빈틈
피로사회 | 한병철 본문
# 피로사회 / 한병철 요약
자본주의 경제의 화두는 '생존'이지, '좋은 삶, 가치로운 삶'이 아니야.
그리고 생존을 위한 유일한 징표는 남과 경쟁하여 얻을 수 있는 '성과'지.
이 성과를 가장 효율적으로 올릴 수 있는 방법이 뭘까?
바로 긍정성이야. 우리가 시험공부할 때도 누가 시켜서 하는 것보다
내가 재밌어서 한다고 자기최면걸면 더 잘 되는 것처럼
현대사회는 "넌 할 수 있어!", "당장 시작해!", "나는 나를 위해서 일한다"는 식의
긍정적인 카피라이트가 넘쳐나지.
즉 '할 수 있다'는 긍정성이 과거에 유행했던 '해야한다'는 부정성을 대체해버리는거야.
이러다 보니 현대사회의 바쁜 직장인들은 그 '바쁨'과 '피로함'을 내심 자랑으로 여기지.
바빠서 여가도 잊고 일하는 모습을 왠지 자기개발과 일에 푹 빠진 프로페셔널의 모습으로
내보이고 싶어할 뿐만 아니라, 이 치열한 사회에서 나는 살아남았다, 혹은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자랑스러워 하는거여.
이러한 성과사회, 긍정사회에서 개인이 기댈 수 있고, 또 기울여야 하는 관심은
오로지 자신의 건강 뿐이야.
가치로운 삶을 살지 못하니까 유일하게 관심을 쏟을 수 있는게 건강인데다
또 건강해야 끝까지 오래 일할 수 있고
그러한 건강한 자신의 외면이 또한 가치가 되는 사회기도 하니까.
주변의 누가 "나 헬스 회원증 등록했어", "나 필라테스해", "주말마다 등산하지"
이런 얘기는 겉으론 부끄럽게 속으론 자랑스럽게 말해도, "나 인문학 독서회에 가입했어"
이런 얘기하면 이상하게 쳐다보잖아?
"저 사람은 돈이 많나? 여유가 넘치나보네? 잘 났군"
이렇게 말이지.
요컨대 현대 자본주의는, 성과사회이자, 과도한 긍정사회가 되어버렸어.
이 과도한 긍정이 소위 이 사회의 트랜드가 된 '건강의 여신'과
결합하면서 이 성과주의사회는 점차 도핑사회로 발전해버려.
성과, 그리고 생존하기 위해 약간 뿅가는 기분으로 일에 빠지는거지.
건강하고 아주 기분좋게 말이야.
이런 현대인들에게 다음의 세가지 병폐가 생겨나게 된다.
외적으로는 멀티태스킹과 SNS 중독이고, 내적으로는 정신적 우울증이지.
[문제1] 멀티태스킹이 왜 문제냐고? 좋은거 아닌가? 능력있는 현대 차도남, 차도녀들의 필수조건이잖어?
근데 사실 멀티태스킹이란게 그다지 진보된 문명의 징표가 아니야.
오히려 퇴화라고 할 수 있는데, 멀티태스킹은 저기 저 밀림의 동물들 사이에서 주로 나타나는 습성이거든.
먹이를 먹으면서 경쟁자를 경계하고 동시에 새끼를 감시하고, 짝짓기까지 해야돼.
그렇게 바쁘니까 동물들이 깊은 사색에 잠기는거 봤어? 못하잖아, 너무 바빠서..
동물들 또한 자본주의 현대인들처럼 '생존'이 가장 중요한 문제인거야.
[문제2] SNS는 왜 또 문제점이냐고? 능력있는 사람의 광범위한 인적 네트워크는 자랑거리 아닌감??
현대 사회는 바빠. 바빠서 외롭지. 왜냐면 바쁘니까 사람 만날 시간이 없거든.
옛날처럼 편지라도 쓰고 싶은데 그럴 시간도 아까워.
페이스북에 글 한번 올리면 소식 전달 다 되고 모두 나의 화려한 삶을 '좋아요~'해주는데 얼마나 좋아?
근데 문제는 이 SNS라는게 사실 가짜 인간관계잖아. 사람을 직접 맞대면하고 대화하는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골라서 늘어세워 놓고, 좋은 얘기만 나열하고, 심지어 버튼도 '좋아요'뿐이지
'싫어요'는 없거든. 이러다 보니 상처받을 일이 없어요. 깊은 인간관계도 불가능하지.
템포가 너무 빠르니까 인간관계도 인스턴트가 되는거여.
이러다보니 실제 인간관계를 접하다보면 너무나 쉽게 상처를 받는거야.
왜냐면 SNS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만 있고, 또 좋아요 밖에 없는데
바깥에서 쪼그만한 싫어요만 한번 겪어도 너무 힘든거야.
즉 SNS의 인간관계에만 너무 익숙해지다보니 실제 현실의 인간관계에 대한 내성이 떨어진거지.
SNS에 빠질수록 실제 인간관계에 대한 적응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어.
[문제3] 이러니까 아예 전 대중적으로 우울증이 급증해버려.
TV, SNS를 보면 나 빼고 전부 잘 사는 것 같거든.
전부 죽을만치 바쁘고 화려하게 사는게 당연한게 되어버리니까
그 중에 하나라도 남들 같지 않은 점이 나한테 있으면 급 우울해져 버리는거야.
사회의 모두가 엘리트가 아닌게 사실 당연한데, 이젠 모두가 엘리트가 되어야 하고
그래야만 생존하는게 대중화되어버리니까..
즉 현대의 우울증이란 소위 "비범한 것이 대중화됨으로써 나타나는" 질병이지.
웃긴건 이 우울증이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거야.
누가 때려서 병이나면 그 사람을 원망이라도 하겠는데,
우울증은 이 긍정사회에서 나 스스로 나 자신에게 "열심히 해! 너도 최고가 되어야 돼!"하며
채찍질했는데, 나 자신이 그러지 못해서 생기는 병이다 보니까, 누구를 원망도 못해요.
안타까운 일이지.
[해법1] 그래서 한병철은 어떤 해법을 꺼낼까? 첫째는 '심심함'이야 .
요즘 사람들은 잠시의 심심함도 용납 못하지. 아까 말했듯이 바쁜게 자랑거리자 생존의 징표거든.
문제는 뭔가 창조적인 사고활동은 인간이 심심할 때 생겨나거든.
여유롭고 심심할 때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조용히 관찰해야 그것을 평소완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잖아?
구글이나 애플같은 회사 봐바. 엄청 여유롭게 일시키잖어. 자유롭게.
걔들은 창조와 혁신이 그런데서 나온다는걸 아는거야.
[해법2] 둘째는 머뭇거림이야. 현대인은 거침없이 나아가는게 자랑거리지. 안절부절함을 견디지 못해.
근데 그건 기계도 마찬가지야. 거침없지. 주어진 연상대로만 행동하니까.
하지만 인간의 사고는 그렇지 않지. 어떠한 행동과 사고 사이에 머뭇거림을 통해
우리는 또 다른 가치있는 선택지와 답을 찾는 여유가 생기거든.
기계가 되지 말라는거야.
[해법3] 셋째는 분노. 위에서 말한 것처럼 지금이 워낙 긍정사회다보니까
인간의 순수한 분노마저도 부정적인 나쁜 것이 되어버렸어.
근데 재밌는건 분노야말로 인류의 역사를 혁변시킨 근원적 감정이거든.
타인의 잘못된 행위를 볼 때 우린 보통 먼저 분노하지. 그리고나서 그걸 바꾸기 위해 행동하잖아.
프랑스혁명, 세계대전, 최근의 뭐시기 뭐시기 특별법 같은것들 봐바.
작게는 내가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에서 화나는 일이 있을 때, 거기에 분노해야만
그 현상을 바꾸거나, 내가 다른데로 이직하거나, 뭔가 변화가 생기거든.
그런데 요즘 사회가 워낙 긍정적이다보니 이 변화의 힘인 순수한 분노조차 부정적인게 되어버려.
이렇게 내적 분노를 표출하지 못하니까 그게 쌓여서 뭐가 돼?
바로 짜증이야. 그리고 스트레스. 화나는 일이 있어도 그걸 표출하지 못하니까 내 안에 짜증으로 쌓여서
나 자신을 좀먹고 내 주변 가까운 사람들을 상처입히는거지.
[해법4] 마지막 해법은 피로야.
뭐야? 이 피곤한 피로사회에서 피로가 해법이라니 자가당착, 이율배반, 모순 아녀?
근데 한병철이 말하는 피로는 두 가지야.
너무 바쁘고 힘들어서 생기는 탈진의 피로와,
이 바쁜 삶에 염증을 느끼며 다가오는 치유의 피로지.
여담이지만 '행복Gluck'이라는 의미의 독일어는 '빈틈Luche'이라는 어원에 유래하거든.
인간이란 삶에 빈 틈이 좀 있어줘야 행복할 여유도 생긴다는거야.
이 치유의 피로에서 우리는 순간 모든 일을 중단하고 모든 대상을
무위 속에서 심심하게, 관조하며, 바라볼 수 있거든.
[의의] 한병철의 현대사회 진단은 엄청나. 괜히 한국인 교수가 독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게 아녀.
문제는 해법인데, 이게 피케티가 말하는 글로벌 자본세만큼 유토피아적이야.
현대사회는 한병철이 말하는 것처럼 탈진의 피로사회인데,
해법으로 말하는 치유의 피로가 생겨나려면 사람이 완전 현세의 모든 것을 내려놓거나
아니면 스스로가 소외되지 않는 창조적인 노동을 해야되는데,
즉 치유의 피로는 애초에 탈진의 피로에서 나오기 힘든건데, 그게 해법이라잖아.
뭔가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은 말 같애. 현실적인 조언이라기엔 좀..
피로사회
Müdig Keits Gesell Schaft
한병철 지음 | 김태환 옮김 | 문학과 지성사 | 2012 (원작 2010)
scene #1 프로메테우스
"잘 알려진 것처럼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과 함께 노동도 가져다주었다. 성과주체는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지만 실은 프로메테우스처럼 묶여 있다. 끝없이 다시 자라나는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먹는 독수리는 성과주체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제2의 자아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프로메테우스와 독수리의 관계는 자기 착취의 관계인 셈이다. 피로란 스스로는 고통을 느낄 줄 모르는 간의 고통이라고들 한다. 따라서 가기 착취의 주체인 프로메테우스는 엄청난 피로에 빠지고 말 것이다. (p. 81)"
- 한병철은 프로메테우스의 상징으로부터 현 사회를 진단한다. 인간에게 불과 문명, 노동을 가져다준 타이탄 일족의 프로메테우스. 올림푸스의 주신인 제우스는 그 댓가로 프로메테우스에게 판도라라는 여성을 보내게 되고,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프로메테우스와 달리, '나중에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동생 에피메테우스는 판도라를 아내로 삼고, 이후 그녀로 하여금 열린 판도라의 상자로부터 인간계에는 세상의 온갖 악이 퍼지게 된다.
이는 벌이 아니라 제우스의 균형이었다. 문명에는 그에 상응하는 사회악이 달라붙는 것이다. 그리고 상자에 남겨진 '희망'은 중도적인 촉매제다. 그 희망으로 인해 성공하는 사람과, 끊임없이 노동하는 사람이 생겨난다.
이후 제우스에게 바쳐진 제물인 짐승고기의 맛있는 부분을 계략을 써 제우스보다 인간들이 더 많이 갖도록 한 프로메테우스는 결국, 코카서스 산의 바위에 쇠사슬로 묶여, 날마다 독수리에게 간을 쪼여먹히는 형벌을 받게 된다.
영원토록 고통받을 것처럼 보였던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아들이자 영웅, 헤라클레스의 도움을 받아 풀려나게 된다.
p. 112
자본주의 경제는 생존을 절대화한다. 자본주의 경제의 관심은 좋은 삶이 아니다. 이 경제는 더 많은 자본이 더 많은 삶을, 더 많은 삶의 능력을 낳을 거라는 환상을 자양분으로 발전한다. 이때 삶과 죽음의 엄격한 분리는 삶 자체마저도 섬뜩한 경직성을 띠게 한다. 좋은 삶에 대한 관심은 생존의 히스테리에 밀려난다.
삶을 감싸던 서사성은 완전히 벗겨졌고 삶은 생동성을 잃어버렸다.
간강에 대한 열광은 삶이 돈쪼가리처럼 벌거벗겨지고 어떤 서사적 내용도 어떤 가치도 갖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사회가 원자화되고 사회성이 마모되어감에 따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존해야 할 것은 오직 자아의 몸밖에 없다.
성과사회는 그 내적 논리에 따라 도핑사회로 발전한다. 단순한 생명 기능으로 환원된 삶은 무조건 건강하게 유지해야만 하는 삶이다. 건강은 새로운 여신이다. 따라서 벌거벗은 생명은 신성하다. 성과사회의 호모 사케르는 절대로 죽일 수 없다는 점에서 주권사회의 호모 사케르와 구별되는 또 하나의 특징을 지닌다. 이들의 생명은 완전히 죽지 않은 자들Untote의 생명과 비슷하다. 그들은 죽을 수 있기에는 너무 생생하고 살 수 있기에는 너무 죽어 있는 것이다.
제1장_ 성과사회- (탈진의) 피로사회의 탄생
- 맑스가 살았던 당시 자본주의 선발국에서, 프로레타리아들의 노동의 산물이 자아실현의 결과로써 자신의 것이 되지 않고, 자본가의 것이 되는 노동의 소외가 만연해졌다. 즉 노동의 현존이 그 본질로부터 심히 괴리됨으로써 자아창조 활동이어야 할 노동이 인간성의 긍정이라기 보다 오히려 그 부정이라는 현실이 된 것이다. 이에 맑스는 자본주의의 종국에 핍박받던 다수의 노동자 계급이 소수의 자본가를 밀어내고 평등한 공산주의 사회를 이룩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예고하게 된다. 그의 예언은 반세기가 지나 현실화되었고 세계의 절반에 달하는 국가들이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일어났다. 맑스는 자신의 책상 앞에서 기술한 몇 권의 책만으로 알렉산더와 칭기스칸이 이룩한 업적을 뛰어넘는 이념의 영토를 통합한 최대의 정복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맑스의 비판이론은 시간이 갈수록 빠른 속도로 그 정치적 실현이 멀어지게 되는데, 그 이유는 첫째로, 사회주의 사회는 가일층 강화된 중앙집권적 관료기구의 출현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베버의 예측이 들어맞았다는 것이다. 소련의 스탈린, 북한의 김일성 등 당조직을 기반삼은 독재자들의 비인간적인 횡포는 세계의 반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둘째는 전후의 미국을 비롯한 선진 자본주의 사회는 여러가지 모순과 갈등을 체제 내에 흡수 통합할 수 있음을 현실적으로 보여주었는데, 예를 들어 당시 자본가들은 쁘띠 브루주아라는 새로운 경제적 계층을 만들어내어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노동으로 평생을 살아야 했던 프롤레타리아들에게 삶의 작은 목표를 던져줌으로써 체제 전체에 대한 시선을 돌리려 했다. 쁘띠 브루주아란 당시 지식인 및 일부 전문기술자 등을 칭하던 용어로 경제적인 개념를 더한 소위 중산층을 말한다.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라는 이분법적 대립제 속에 중산층이라는,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진입이 가능한 계급을 설정하여, ‘타도 자본가’ 논리를 흐린 것이다.
셋째로, 특히 대중문화를 통해서 가시적인 억압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대다수 시민의 의식을 기존체제의 요구에 순응하도록 조종할 수 있었다. 프로이트는 사유재산제도를 철폐하면 인간간의 적대적 관계가 해소될 수 있다고 믿는 사회주의 사상가들의 신념을 ‘근거없는 환상’이라 비판하면서, 경제적으로 평등한 사회에서도 성적 욕구와 공격본능으로 인하여 인간은 격렬한 적대적 관계를 극복하기 어렵다고 보았는데, 자본가들은 일찍이 이러한 인간의 특성을 기반하여 문화산업을 통한 억압기제를 구축하게 된다. 마르쿠제에 따르면, 과학과 기술이 고도로 발전한 후기 산업사회는 높은 생산성으로 인하여 물질적 풍요를 이룩하고, 노동시간의 단축에 따른 여가시간의 증대로 인하여 리비도의 에너지가 흘러넘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흘러 넘치는 본능적 에너지 즉 과잉의 에너지가 잘못 정치적으로 동원되면, 맑스의 예측과 같이 기존의 체제를 전복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현대사회는 영화, 게임, 섹스, 스포츠, 향락산업, 성의 해방, 프로노그라피 등 흥행위주의 문화산업과 퇴폐적 활동을 조장함으로써 에로스의 창조적 스오하를 방해하고 허위의 욕구를 충동하여 비판적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즉 현대사회의 억압과 통제원리는 물리적 억압이나 가시적 폭력보다 더욱 무서운 가공할 억압의 메커니즘이다. 이와 같은 향락 및 흥행위주의 퇴폐적인 문화산업은 긍정적 문화를 짓밟고, 해방과 자유를 표방하면서 인간이성을 마비시키기에 억압적이며, 에로스의 창조적 승화를 가로막는 것이므로 역승화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을 향략위주의 일차원적 존재로 전락시키는 후기 산업사회의 지배원리를 마르쿠제는 억압적 역승화라 하였다.
이처럼 후기 산업사회 즉 자유 자본주의 사회는 맑스의 정확한 계산과 예측 덕분에 도리어 자본가들을 학습시켜 더욱 첨예하고 고도의 사회상을 구현하여 수많은 노동자들이, 마치 자신들이 자유로운 선택과 활동 하에서 더이상 체계의 불균등함을 논하지 않고 단지 한 단계 위의 쁘띠 브루주아가 되어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안락한 삶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그들 자발적으로 노동을 소외해나가게 만들 수 있었다. 그간에 발생하는 스트레스와 피로, 짜증과 허무감은 정부가 표현의 자유, 성의 해방이라는 기조 아래 넓혀 나가는 속칭 3S 즉, 섹스, 스크린, 스포츠를 통해 해소해나가도록 열어둔 창구에서 마치 마약과 같이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게 해주는 것이다.
‘1984’의 조지 오웰은 정부와 사회에 의해 독서를 금지당하는걸 두려워 하였지만 ‘멋진 신세계’의 헉슬리는 사람들이 TV, PC, 영화, 스마트폰 등으로 책을 읽지 않아 금지할 이유가 없게 되는 것을 두려워 했다. 오웰은 정보가 차단 당하는 것을 두려워 하였지만, 헉슬리는 우리에게 너무 많은 정보가 주어져 소극적이고 자기중심적이 되는 것을 두려워 하였다. 오웰은 우리에게 진실이 전달되지 않을 것을 두려워 하였지만, 헉슬리는 진실이 쓸데없는 정보의 바다에 휩쓸려 하찮은 가십으로 전락될 것을 두려워 하였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언급했듯이 독재에 대항하는 자유주의자들과 합리주의자들은, 대중이 얼마나 쉽고 빠르게 이념과 체제적 진실에 흥미를 잃고 정신이 흩어지는지 고려하지 않았다. ‘1984’에서 사람들은 고통으로 조종당하지만, ‘멋진 신시계’에서 사람들은 쾌락에 의해 조종당한다. 한마디로 오웰은 우리가 증오하는 것들이 우리를 망하게 한다 생각했지만, 헉슬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이 우리를 망하게 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p. 83
오늘의 사회는 날이 갈수록 금지와 명령의 부정성을 철폐해가며 자유로운 사회를 자처하는 성과사회이다. 성과사회를 규정하는 조동사는 프로이트의 “해야 한다”가 아니라 “할 수 있다”이다.
후기 근대의 성과주체는 의무적인 일에 매달리지 않는다. 복종, 법, 의무 이행이 아니라 자유, 쾌락, 선호가 그의 원칙이다. 그가 노동에서 기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쾌락의 획득이다. 그의 노동은 향유적 노동이다. 그는 타자의 명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그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게 귀를 기울인다. 그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가 되어야 한다.
타자로부터의 자유는 나르시시즘적 자기 관계로 전도되며, 이는 오늘날 성과주체가 겪는 많은 심리적 장애의 원인이 된다.
제2장_ 멀티태스킹-SNS
p. 30 [편집]
멀티태스킹이라는 시간 및 주의 관리 기법은 문명의 진보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퇴화라고 할 수 있는데 멀티태스킹은 수렵자유구역의 동물들 사이에서도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습성이다. 먹이를 먹는 먹으면서 경쟁자를 경계하고 동시에 새끼를 감시하고 짝짓기를 해야하는 등, 그런 까닭에 동물들이 깊은 사색에 잠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동물은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대상에 사색적으로 몰입할 수 없다.
이처럼 멀티태스킹은 후기 근대의 노동 및 정보사회를 사는 인간만이 갖추고 있는 능력이 아니다. 최근의 사회적 발전과 주의구조의 변화는 인간 사회를 점점 더 수렵자유구역과 유사한 곳으로 만들어 간다. 이곳에서 말하는 좋은 삶에 대한 관심은 날이 갈수록 마치 동물들의 그것처럼 생존 자체에 대한 관심에 밀려나고 있다.
p. 95
새로운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기술도 타자를 향한 존재의 두께를 더욱 줄여놓는다. 가상공간에서는 타자성과 타자의 저항성이 부족해진다. 가상공간에서 자아는 사실상 “현실원리” 없이, 다시 말해 타자의 원리와 저항의 원리에 구애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다. 가상현실 속의 상상적 공간에서 나르시스적 주체가 마주하는 것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다. 실재가 무엇보다도 그 저항성을 통해 존재감을 가진다면, 가상화와 디지털화의 과정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그러한 실재를 지워나간다. 실재는 두 가지 의미에서 우리를 붙잡는다. 즉 일을 중단시키고 저항하여 발목을 잡을 뿐만 아니라 기댈 수 있는 받침대로서 우리를 잡아주는 것이다.
과도한 선택의 자유를 누리는 후기근대의 성과주체는 강력한 유대의 능력을 잃어버린다. 우울증은 모든 유대를 끊어버린다.
p. 96
소셜 네트워크 속의 “친구들”은 마치 상품처럼 전시된 자아에게 주의를 선사함으로써 자아 감정을 높여주는 소비자의 구실을 할 따름이다.
뭔가 엘리트적 분위기를 풍기는 멜랑콜리가 대중화되어 우울증이 되었다는 것이다. “멜랑콜리가 비범한 인간의 고유한 특징이었다면 우울증은 비범한 것이 대중화됨으로써 나타나는 현상이다.”
p. 91
우울증 환자는 무형적이다. 그는 성격 없는 인간이다. 더욱 일반화하여 말한다면 후기 근대의 자아는 성격이 없다. 카를 슈미트는 “진짜 적이 단 한 명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은 내적 분열의 신호라고 말한다. 이 말은 친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타당하다. 진정한 친구가 단 한 명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은 슈미트에 따르면 무성격과 무형태의 신호인 것이다. 슈미트가 살아 있다면 페이스북의 수많은 친구들은 그에게 후기근대적 자아가 성격 없고 무형적임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로 여겨질 것이다. 긍정적으로 보아준다면 성격 없는 인간이란 어떤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고 어떤 역할이나 기능도 수행할 수 있는 유연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무형성 내지 유연성은 높은 경제적 효율을 가능하게 한다.
p. 66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다.
이런 분열적인 피로는 인간을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상태”로 몰아넣는다. 오직 자아만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그토록 심한 피로 때문에 우리에게서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영혼이 다 타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피로는 폭력이다. 그것은 모든 공동체, 모든 공동의 삶, 모든 친밀함을, 심지어 언어 자체마저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런 종류의 피로는 필연적으로 폭력을 낳았다.
p. 41
근대는 신과 피안에 대한 믿음뿐 아니라 현실에 대한 믿음까지도 상실하는데, 이러한 상황은 인간 삶을 극단적인 허무 속에 빠뜨린다. 유사 이래 삶이 오늘날처럼 덧없었던 적은 없었다. 극단적으로 덧없는 것은 인간 삶만이 아니다. 세계 자체도 그러하다. 그 어디에도 지속과 불변을 약속하는 것은 없다. 이러한 존재의 결핍 앞에서 초조와 불안이 생겨난다. 노동하는 동물이 어떤 유에 속하고 자신이 속한 유를 위해 노동하는 거이라면 여기에는 동물다운 느긋함이 생겨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기근대의 자아는 완전히 개별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죽음의 기술로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덜어주고 지속의 감정을 불러일으켜야 할 종교도 이제 그 시효가 다 되었다. 세계는 전반적으로 탈서사화되었으며, 이로 인해 허무의 감정은 더욱 강화된다.
서사성을 지닌 죽음의 기술이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벌거벗은 생명 자체라도 건강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겨난다. 이미 니체가 말했듯이 신의 죽음 이후에는 건강이 여신의 자리에 등극한다. 만일 벌거벗은 생명 자체를 넘어서는 의미 지평이 존재한다면, 건강의 가치가 이토록 절대화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제3장_ 우울증
p. 24
성과사회는 점점 더 부정성을 폐기하고 있다.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이 성과사회의 긍정적 성격을 정확하게 드러내준다. 이제 금지, 명령, 법률의 자리를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대신한다. 규율사회에서는 여전히 ‘노No’가 지배적이었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p.26
알랭 에랭베르Alain Ehrenberg는 우울증을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이행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규정한다. “우울증이라는 병은 권위적 강제와 금지를 통해 인간에게 사회 계급과 성별에 따른 역할을 부여하는 규율적 행위 조종의 모델이 만인에게 자기 주도적으로 될 것, 자기 자신이 될 것을 요구하는 새로운 규범으로 대체되는 순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 우울한 자는 컨디션이 완전히 정상이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부응하려고 애쓰다가 지쳐버리고 만다.” 알랭 에랭베르의 논의가 안고 있는 문제점은 우울증을 단지 자아의 경제라는 관점에서만 관찰한다는데 있다. 오직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명령이 우울증을 낳는다는 것이다. 그에게 우울증은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한 후기근대적 인간의 좌절에 대한 병리학적 표현이다. 그러나 우울증을 초래하는 요인 가운데는 사회의 원자화와 파편화로 인한 인간적 유대의 결핍도 있다. 우울증의 이러한 측면은 에랭베르의 논의에서 빠져 있다. 그는 성과사회에 내재하는 시스템의 폭력을 간과하고 이러한 폭력이 심리적 경색을 야기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오직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명령이 아니라 성과를 향한 압박이 탈진 우울증을 초래한다.
그렇게 본다면 소진증후군은 탈진한 자아의 표현이라기보다는 다 타서 꺼져버린 탈진한 영혼의 표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에랭베르에 따르면 우울증은 규율사회의 명령과 금지가 자기 책임과 자기 주도로 대체될 때 확산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실제로 인간을 병들게 하는 것은 과도한 책임과 주도권이 아니라 후기근대적 노동사회의 새로운 계율이 된 성과주의의 명령이다.
p. 27
하지만 정작 니체라면 대중의 현실이 되려고 하는 저 인간형을 가리켜 주권적 초인이 아니라 그저 노동만 하는 최후의 인간이라고 했을 것이다. 긍정성의 과잉 상태에 아무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그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animal laborans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강조적 의미의 자아 개념은 여전히 면역학적 범주다. 그러나 우울증은 모든 면역학적 도식 바깥에 있다.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Schaffens- und Könnensmüdigkeit이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다Nicht-Mehr-Können-Können는 의식은 파괴적 자책과 자학으로 이어진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과 전쟁 상태에 있다. 우울증 환자는 이러한 내면화된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군인이다.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으로서,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을 반영한다.
p. 28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이러한 자기 관계적 상태는 어떤 역설적 자유, 자체 내에 존재하는 강제구조로 인해 폭력으로 돌변하는 자유를 낳는다. 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은 바로 이러한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출인 것이다.
p. 94
우울증에는 아예 타자의 차원이 개입되어 있지 않다. 소진은 자주 우울증으로 귀결되거니와 이때 우울증을 유발하는 원인으로는 오히려 과도한 긴장과 과부하로 파괴적 특성까지 나타내는 과잉 자기 관계를 들 수 있는 것이다. 탈진과 우울상태에 빠진 성과주체는 말하자면 자기 자신에 의해 소모되어버린 셈이다.
제4장_ 해법 1) 심심함
p. 32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 주의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 다양한 과업, 정보 원천과 처리 과정 사이에서 빠르게 초점을 이동하는 것이 이러한 산만한 주의의 특징이다. 그것은 심심한 것에 대해 거의 참을성이 없는 까닭에 창조적 과정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는 저 깊은 심심함도 허용하지 못한다. 잠이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생하고 가속화할 따름이다. 이완의 소멸과 더불어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이 소실되고 “귀 기울여 듣는 자의 공동체”도 사라진다.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은 깊은 사색적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능력에 바탕을 둔다. 지나치게 활동적인 자아에게 그런 능력은 주어지지 않는다.
지속의 형식 또는 지속의 상태는 과잉활동성 속에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사색하는 상태에서만 자기 자신의 밖으로 나와서 사물들의 세계 속에 침잠할 수 있는 것이다.
존재를 의지로 대체한 니체조차 인간에게서 모든 관조적 요소가 제거된다면 인간 삶은 치명적인 과잉활동으로 끝나고 말 것임을 알고 있었다. “우리 문명은 평온의 결핍으로 인해 새로운 야만 상태로 치닫고 있다. 활동하는 자, 그러니까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따라서 관조적인 면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는 것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인간 성격 교정 작업 가운데 하나이다.”
제5장_ 해법 2) ‘보는 법’에 대한 교육; 머뭇거림-무위
p. 47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은 “정신성을 갖추기 위한 최초의 예비 교육”이다. 인간은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니체가 말한 “중단하는 본능”이 없다면 행동은 안절부절 못하는 과잉활동적 반응과 해소 작용으로 흩어져버릴 것이다.
머뭇거림은 긍정적 태도는 아니지만, 행동이 노동의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는 데 필요불가결 요소이다.
기계는 잠시 멈출 줄을 모른다. 컴퓨터는 엄청난 연산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다. 머뭇거리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제6장_ 해법 3) 분노
p. 50
전반적인 가속화와 활동과잉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분노하는 법도 잊어가고 있다. 분노는 특별한 시간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전반적인 가속화 및 활동과잉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가속화와 활동과잉은 넓은 시간적 지평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때 미래는 현재를 연장시킨 것 정도로 축소되고, 다른 것에 시선을 던질 수 있는 부정적 태도가 싹틀 여지는 전혀 없다. 반면 분노는 현재에 대해 총체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분노의 전제는 현재 속에서 중단하며 잠시 멈취 선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분노는 짜증과 구별된다. 오늘의 사회를 특징짓는 전반적인 산만함은 강렬하고 정력적인 분노가 일어날 여지를 없애버렸다. 분노는 어떤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오늘날은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점점 더 확산되어간다. 사람들은 불가피한 일에 대해서도 짜증을 내곤 한다. 짜증과 분노의 관계는 공포와 불안의 관계과 유사하다. 공포가 특정한 대상에 관한 것이라면 불안은 존재 자체의 문제이다. 불안은 현존재 전체를 붙들고 흔들어댄다. 분노 역시 하나하나의 사태에 관한 것이 아니다. 분노는 전체를 부정한다. 분노가 보여주는 부정성의 에너지는 바로 여기에 있다. 분노는 예외적 상태이다. 세계가 점점 더 긍정적으로 되어가면서 예외적 상태도 더 줄어든다.
p. 52
힘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긍정적 힘으로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 힘으로서 하지 않을 수 있는 힘, 니체의 말을 빌린다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이다. 이러한 부정적 힘은 단순한 무력함, 무언가를 할 능력의 부재와는 다른 것이다. 무력함은 단순히 긍정적인 힘의 대립항일 뿐이다. 무력함은 무언가를 해내지 못하는 것으로, 결국 그 무언가에 대한 종속이며 그 점에서 긍정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부정적 힘은 무언가에 종속되어 있는 이런 긍정성을 넘어선다. 그것은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다. 지각하지 않을 수 있는 부정적 힘 없이 오직 무언가를 지각할 수 있는 긍정적 힘만 있다면 우리의 지각은 밀려드는 모든 자극과 충동에 무기력하게 내맡겨진 처지가 될 것이고, 거기서 어떤 “정신성”도 생겨날 수 없을 것이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만 있고 하지 않을 힘은 없다면 우리는 치명적인 활동과잉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 무언가 생각할 힘밖에 없다면 사유는 일련의 무한한 대상들 속으로 흩어질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기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긍정적 힘, 긍정성의 과잉은 오직 계속 생각해나가기만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무위의 부정성은 사색의 본질적 특성이기도 하다. 예컨대 참선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들이닥쳐 오는 것에서 스스로를 해방함으로써 무위의 순수한 부정성, 즉 공에 도달하려 한다. 그것은 극도로 능동적인 과정이며 수동성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참선은 자기 안에서 어떤 주권적 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연습, 중심이 되고자 하는 연습이다. 이에 반해 긍정적 힘만을 지닌 사람은 대상에 완전히 내맡겨진 신세가 된다. 역설적이게도 활동과잉은 극단적으로 수동적인 형태의 행위로서 어떤 자유로운 행동의 여지도 남겨놓지 않는다. 그것은 긍정적 힘의 일방적 절대화가 낳은 결과이다.
제7장_ 해법 4) 근본적 피로 - 탈진의 피로에서 치유의 피로
p. 68
“근본적 피로”는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는 탈진 상태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근본적 피로는 오히려 특별한 능력으로 묘사된다. 그것은 영감을 준다. 그것은 정신이 태어나게 한다. “피로의 영감”은 무위에 관한 것이다.
피로는 특별한 태평함, 태평한 무위의 능력을 부여한다.
오히려 피로 속에서 특별한 시각이 깨어난다. 한트케는 이를 두고 “눈 밝은 피로”라고 말한다.
더 이상 탐욕도 없고 손에 움켜쥔 것도 없고, 그저 놀이만이 있을 뿐이었다. 깊은 피로는 정체성의 조임쇠를 느신하게 풀어놓는다.
그리고 이런 특별한 무차별성으로 인해 우애의 분위기를 띠기 시작한다. 타자들과의 사이를 가르는 경직된 경계선은 거두어진다.
이러한 피로는 깊은 우애를 낳고 소속이나 친족관계에 의존하지 않는 공동체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비록 이들 중 그 누구도 다른 존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순간에는, 나의 순간 속에서만큼은, 모드가 나란히 함꼐 있는 것이다.
피로의 구름이, 에테르 같은 피로가 당시 우리를 하나로 엮어 주고 있었다.
탈진의 피로는 긍정적 힘의 피로다. 그것은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 간다.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원래 그만둔다는 것을 뜻하는 안식일도 모든 목적 지향적 행위에서 해방되는 날,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날이다. 그것은 막간의 시간이다. 신은 창조를 마친 뒤 일곱째 날을 신성한 날로 선포했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목적 지향적 행위의 날이 아니라 무위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이다. 그날은 피로의 날이다.
피로는 무장을 해제한다. 피로한 자의 길고 느린 시선 속에서 단호함은 태평함에 자리를 내준다. 막간의 시간은 무차별성의 시간, 우애의 시간이다.
p. 82
카프카는 치유적인 피로, 상처를 아물게 하는 피로를 상상한다. “신들도 지쳤고 독수리도 지쳤으며 상처도 지쳐서 저절로 아물었다.”
결언_ 이의적 의미의 피로사회 - 치유의 피로의 역설
- 한병철과 한트케가 말하는 치유의 피로는 비본래적 삶을 살고 있는 좀비들의 소외적 노동의 귀결로써는 결코 나올 수 없는 피로다. 그것의 자연스런 귀결은 짜증과 스트레스, 퇴폐와 향락이다. 그가 말하는 치유의 피로가 나오기 위해서는 오직 본래적 삶을 사는 존재자가 소외되지 않은 자신의 창조적인 노동을 결과로서만 나올 수 있다.
지금의 사회는 한병철이 진단한 바와 같이 탈진의 피로사회다. 이 사회에 내던져진 사람들에게 그가 말하는 치유의 피로는 역설이다. 치유의 피로는애초에 탈진의 피로사회에서 나올 수 없는 사생아다.
그의 진단은 정확했으나, 그의 해법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 같다. 현실적인 귀결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극단적인 노자적 무위, 불가적 관조가 더 현실적으로 들릴만치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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