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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한나 아렌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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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한나 아렌트

prs21 2016. 9. 11. 19:30


양심이라는 말에서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허풍을 보았을 뿐 아니라, '일반인'이라면 느꼈을 법한 양심의 가책의 징후를 아렌트는 한 번도 발견한 적이 없었다. 아렌트에게는 양심이 인간에게 본연적인 것이 아니라, 환경과 사회적 여건에 이미 제약되어 있는 것일 뿐이다.

p.19

아렌트는 아이히만에게서 서로 긴밀히 연결과 세 가지의 무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그리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이 그것이다(106쪽). 그런데 세 번째의 무능성은 곧 판단의 무능성(inability to judge)을 의미한다. 그리고 판단 능력이란 옳고 그름을 가리는 능력을 의미한다. 판단이란 사유와 의지와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라고 아렌트는 이애하고 있다.

...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이 책에 담긴 다른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다. 최종 해결책을 추진하면서 나치스는 유대인 학살과 관련한 언어규칙을 만들었다. 이 언어규칙이란 학살이나 유대인의 이송과 같은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우회적 표현법을 만들어 대신 사용한 것을 말한다. 예컨대 학살은 최종 해결책, 완전 소개, 특별취급으로, 유대인의 이송작업은 재정착, 동부지역 노동 등으로 불렀다. ...그런데 이들은 암호화된 언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있었지만 일상의 업무 수행과정에서는 자신들 간에도 암호화된 언어를 사용했다. 그 효과에 대해 아렌트는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을 그와 같은 사람들이 모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살상과 거짓말에 대한 그들의 오랜 '정상적인' 지식과 동일시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한 것" (150쪽)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이 문제 처리에 본질적이었던 아주 다양한 많은 협조체제를 이루어갈 때 질서와 제정신을 유지하는 데 엄청난 도움"(150쪽)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이 하는 역할은 실재(the reality), 즉 현실을 알게 하는 것이다.
말은 우리를 현실과 연결시켜준다. 나치스가 언어규칙을 만든 이유는 암호화된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의 현실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말은 현실의 힘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한다. 아이히만이 상투어를 사용하고 판사들이 그의 말에서 공허감을 느꼈을 떄, 판사들이 그에게서 바란 것은 사실에 충실한 언어였다. 공허하다는 것은 현실의 힘이 결여되었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의 의식에 가득 찬 상투어들은 아이히만이 현실의 힘을 느끼지 못하도록 막았던 것이다. 상투어들은 아이히만으로 하여금 심지어 죽음의 힘조차도 느끼지 못하게 만든 것이었다. 

...

아렌트가 이야기의 방식으로 자신의 입장을 풀어낸 이유는, 이야기를 통해서만 우리는 단순히 과거를 기술하고 이해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미래 지향적으로 이해가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벤하비브의 말처럼 "마음을 미래로 향하게 해줄 수 있는 이야기"를 얻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야기가 중요하다.이야기는 이론과는 달리 현실의 힘을 반영하는 일상 언어를 사용한다. 일상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이야기는 보편적인 설득력을 가질 자격을 갖춘다. 구체적인 현실의 힘을 반영하면서도 보편적 설득력을 가질 자격을 갖는다는 점에서 이야기는 구체와 보편의 양 측면의 힘을 동시에 반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야기는 어떤 이론이 정치적으로 수용 가능한지를 검증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 이야기될 수 있다는 것은 곧 받아들여지기 위한 첫 단계에 해당된다. 실제로 수용될 것인지를 가늠하는 기준은 제시될 수 없다. 그 기준을 제시한다면 자유주의적 준거를 제시하는 것과 같은 특성이 될 수 있겠으나, 동시에 그것은 공허할 것이다. 수용의 여부는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가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이약기되는가와 연결된다. 이떄 전제되는 것은 보편적 원리나 준거가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사람의 존재이다. 이를 달리 표현한 것이 『칸트 정치철학 강의』에서 아렌트가 제시한 공통감(sensus communis) 개념이다.

p.22 

'끔찍하게도 또 전율스럽게도 정상적인' 아이히만에 의해 자행된 '인류에 대한 범죄'는 푝력의 행위(즉 홀러코스트)를 포함한다. 폭력은 차이를 지우려 할 때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값비싼 대가이다. 인종차별주의로서의 나치즘의 경우가 그러했다. 나치즘의 반유대주의의 목표는 어떠한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유대인종을 이 지구상에서 쓸어 내려는, 멸절시키려는 것이었다. 전쟁도 또한 '전율스럽게도 정상적'으로 되었다. 전쟁은 정치만큼이나 필수 불가결한 것이 되었다. 

...우리는 전쟁에 마취되어버렸거나 그것을 정상적인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 전쟁을 일상적인 인간의 삶의 한 측면으로 '아무 생각 없이'(무사유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평범하게 되어 버렸다. 아렌트가 주장한 것처럼, "우리 모두의 안에 아이히만"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기술, 특히 미디어 기술이 우리를 점점 더 일차원적으로, 심지어 전체주의적으로 만들고 있다. 미디어(매체)가 메시지가 되어감에 따라, 간단히 말해, 미디어는 우리를 더욱더 평범하게, 획일적으로, 그리고 생각 없이 만든다. 필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점점 더 일차원적으로 그리고 전체주의적으로 되어왔고, 또 그렇게 되어가게 될 이 지구상의 인류를 위해 아이히만의 '악의 평범성'에 대한 아렌트의 담론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가장 궁극적이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두 번째로 궁극적인 메시지라는 것이다. 여기서 벗어나는 길은 없어 보인다. 지구상의 인류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해서도 불필요한 잔인함, 죽음, 고통을 끼치는 데 이를 것이라고 필자가 두려워하는 '무사유'를 우리 모두의 모습으로 갖는 데 이르게 될 것이다. 바로 이때 인류의 역사는 깨어날 길이 없는 악몽이 될 것이다.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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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허풍 떠는 것은 일반적인 악덕인 반면, 더 구체적이고 결정적인 아이히만의 성격 결함은 그에게 그 어느 것도 타인의 관점에서 바라 볼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점이었다. 

p.104

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speak)은 그의 생각하는데 무능력함(inability to think),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와는 어떠한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이는그가 거짓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말(the words)과 다른 사람들의 현존(the presence of others)을 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reality as such)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p.106

아니면 이것은 단지 영원히 회개하지 않는 범죄자(토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일기에서, 시베리아에 있는 수많은 살인자와 강간범, 도둑들 사이에서, 자신이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의 예일 뿐인가? 그런 사람이라면 자신의 범죄가 현실의 한 부분으로 되어버렸기 때문에 현실을 대면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p.109

전시에 독일 국민 전체에 대해 가장 효과적인 거짓말은 히틀러나 괴벨스가 만든 '독일 민족을 위한 운명의 전투'(der Schicksalskampf des deutschen Volkes)라는 구호였다. 이 구호는 세 가지 면에서 쉽게 자기기만에 빠지게 해주었다. 그것은 첫째로 전쟁은 전쟁이 아니라고 암시했다. 둘째로 전쟁을 시작한 것은 운명이지 독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셋째로 전쟁은 독일인들의 생사가 걸린 문제로, 이들은 적을 전멸시켜야지, 그렇지 않으면 전멸당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p.110

검찰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가 '괴물'이 아님을 알 수 있었지만, 광대라고 의심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의심은 재판의 전체 계획에 치명적일 수 있고, 그와 그 같은 이들이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안겨준 고통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런 의심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가 행한 최악의 광대짓들은 거의 주목받지 않았고, 거의 보도된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허송한 젊은 시절에 배운 단 한 가지는 바로 맹세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대단히 강조하며 선언하고는 ("오늘 그 누구도, 어떤 판사도, 나로 하여금 증인으로서 선서한 진술을 하도록 할 수 없고, 선서상태에서 무엇을 단언하도록 할 수 없습니다. 나는 거절합니다. 내 경험상 누군가가 맹세를 성실하게 따르면 어느 날 그 대가를 치르게 되기 때문에, 나는 앞으로 영원히 이 세상이나 어떤 다른 권위로도 나로 하여금 맹세를 하거나, 선서 하의 증언을 하게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마음 먹었습니다. 나는 자발적으로 선서하지 않을 것이며 그 누구도 내게 강요할 수 없습니다."), 그 후에 판사로부터 자신의 변호를 위한 증언을 하고 싶으면 "선서를 한 뒤 할 수도 있고 선서 없이 할 수 있다."는 말을 분명히 듣고 난 뒤, 두말 않고 즉시 선서 아래에서 증언을 하겠다고 선언하는 사람과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또는 경찰심문관에게 그랬듯이, 법정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악의 짓은 자신의 진정한 책임을 벗어나 자신의 목숨을 위해 싸우거나 자비를 간청하는 것이라고 반복해서 매우 감정적으로 확언한 뒤, 자신의 변호인의 지시에 따라 자비를 호소하는 자필 문서를 제출한 사람과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아이히만에게는 이것은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들이었고, 그가 기억 속에서나 즉흥적으로 자신의 기분을 북돋우는 광용구들을 찾을 수 있다면 그는 '모순' 따위는 한 번도 의식하지 않은 채 아주 만족스러워 했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상투어로 자신을 위로하는 이 끔찍한 재능은 죽음의 순간까지도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p.112

나아가 이 문제를 다루는 모든 문서들은 엄격한 '언어규칙'을 따랐다. 돌격대로부터 오는 보고서를 제외하고 '제거', '박멸' 또는 '학살' 같은 명백한 의미의 단어들이 쓰여 있는 보고서를 발견하기는 거의 드문 일이다. 학살을 처방하는 암호는 '최종 해결책', '소개'(Aussiedlung)와 '특별취급(Sonder-behandlung) 등이었다. 이송에는 ('거주지 변경'이라고 불린 특권층 유대인을 위한 '노인들의 게토' 테레지엔슈타트로가는 유대인을 포함한 경우는 제외하고) '재정착(Umsiedlung)과 '동부지역 노동'(Arbeitseinsatz im Osten)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p.149

언어규칙이 고안된 또 다른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그 규칙은 이 문제 처리에 본질적이었던 아주 다양한 많은 협조체제를 이루어 갈 때 질서와 제정신을 유지하는 데 엄청난 도움이 되었음이 입증되었다. 더욱이 '언어규칙'(Sprachregulung)이란 용어 자체가 암호였다. 그 말은 일상어로는 거짓말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지칭할 수 있었다. 

p.150

나치 고위층 가운데 양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가장 재능이 있었던 요원은 힘러였다. 그는 히틀러가 1931년 친위대 앞에서 행한 연설에서 따온 '나의 명예는 나의 충성심'과 같은 슬로건들을 만들어 냈다. 이러한 구절들을 아이히만은 '날개 달린 말들'이라고 불렀고 재판관들은 '공허한 말들'이라고 불렀다. 아이히만이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힘러는 이러한 말들을 아마도 크리스마스 보너스와 함께 끄집어내어 '1년 내내' 사용하도록 했다. 아이히만은 이 말들 가운데 한 가지만을 기억해서 계속 반복했다. 그것은 "이는 미래의 세대들이 다시는 싸울 필요가 없는 전쟁이다."는 것으로 여성과 아이들, 노인들, 그리고 다른 '쓸모없는 입들'에 대한 전쟁임을 암시했다.

...

그런데 힘러가 이데올로기적 용어를 사용하여 정당화하려 한 적이 거의 없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만일 그가 그렇게 했더라도 그것은 곧 잊혔을 것이 분명하다. 살인자가 된 이 사람들의 마음에 꽂힌 것은 단지 역사적이고 장엄하고 독특한 어떤 일('2000년 역사에 오직 한 번 일어나는 사건'), 따라서 감당하기 어려운 일에 관계하고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이 점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살인자들은 사디스트나 천성적인 살인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자신이 하는 일에서 육체적 쾌락을 얻는 사람들은 모두 색출하는 데 체계적인 노력이 기울여졌다. 돌격대 부대는 독일의 어느 일반 부대보다 범죄 기록을 더 많이 갖고 있지 않은 군대 조직인 무장 친위대로부터 징발되었다. 그리고 그 지휘관들은 하이드리히가 대학 학위를 가진 친위대 엘리트 가운데서 선택했다. 따라서 문제는 양심을 어떻게 극복하는가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정상적인 사람들이 육체적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는 데서 느끼게 되는 동물적인 동정심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힘러가 사용한 책략은 (그는 스스로도 이런 본능적인 반응을 다소 강하게 느꼈던 것 같다) 아주 단순했고 또 아주 효과적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이러한 본능을 뒤집는 것으로,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향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일을 하고 있는가, 라고 말하는 대신, 나의 의무를 이행하는 가운데 내가 얼마나 끔찍한 일을 목격해야만 하는가, 내 어깨에 놓인 임무가 얼마나 막중한가, 라고 살인자들은 말할 수 있게 되었다. 

p.173

기만과 은폐를 위해 교묘하게 고안된 다양한 '언어규칙' 가운데 이처럼 히틀러가 첫 번째 전쟁을 벌이는 데 살인자들의 정신상태에 작용한 것보다도 더 결정적인 효과를 발휘한 것은 없었다. 여기서 '살인'이라는 말 대신 '안락사 제공'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이 사람들의 최종 목적지가 여하튼 분명한 죽음이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불필요한 고통'을 피하도록 하라는 지시가 조금 반어적인 것이 아니었는가를 경찰심문관이 물었을 때 아이히만은 이 질문을 이해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용서할 수 없는 죄는 사람들을 죽인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고통을 일으키는 것이었다는 것이 아직도 너무나 확고하게 그의 마음속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재판 기간동안 그는 증인이 친위대 대원에 의해 자행된 잔인하고 잔혹한 일을 증언하면 예외 없이 진지한 분노를 표시했다. ...그를 진정으로 동요하게 만든 일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비난이 아니라 자기가 유대인 소년을 때려죽인 적이 있었다는 (법원에 의해 기각된) 한 증인의 비난이었다.

p.177

그가 행한 모든 일은 그가 법을 준수하는 시민으로서 인식한 만큼 행동한 것이었다. 그는 경찰과 법정에서 계속 반복해서 말한 것처럼 의무를 준수했다. 그는 명령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법을 지키기도 했다.

p.209

"우리가 아는 것은 이것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심하게 저항하거나 학살부대에 반대하는 무슨 일을 한 사람은 누구나 24시간 내에 체포되어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그들이 그들의 적으로 하여금 자신의 신념에 따라 위대하고 극적인 순교자적 죽임을 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우리나라의 전체주의 정부가 교묘하게 꾸며낸 일들 가운데 하나였다. 우리들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죽음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전체주의 국가는 그들의 적들을 침묵하는 익명성 속에서 사라지도록 한다. 조용히 이러한 범죄를 감내하기보다 감히 죽음을 감당하려 한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려 했겠지만 쓸데없는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그러한 희생이 도덕적으로 무의미했을 거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실질적으로 쓸모없었을 것이라는 것뿐이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깊이 뿌리내린 확신을 갖고 있어서 보다 고차원적인 도덕적 의미를 위해 실질적으로 쓸모없는 희생을 감당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덧붙일 필요도 없이, 저자는 '보다 고차원적인 도덕적 의미'라고 부른 것이 없다면 그가 그렇게 강조한 '품위'가 공허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

전체주의 지배체계는 선하거나 악한 모든 사실들을 사라져버리게 하는 망각이라는 구멍을 마련하려고 애쓰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1942년 6월 이래로 있었던 대량학살의 모든 흔적을 지우려는 소란스러웠던 시도들이 실패할 운명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적들이 '완전한 익명 속에서 사라져버리도록' 한 모든 노력들은 허사였다. 망각의구멍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적인 어떤 것도 완전하지 않으며, 망각이 가능하기에는 이 세계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야기를 하기 위해 단 한 사람이라도 항상 살아남아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것도 '실질적으로 불필요'하지 않다. 적어도 장기적으로는 아니다. 만일 그러한 이야기가 더 많이 들려진다면, 이는 오늘의 독일을 위해서, 단지 독일의 해외에서의 위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슬프게도 혼란스러운 내면적 조건을 위해서도 실질적으로 아주 유용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단순하며 모든 사람들이 파악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그 교훈이란 공포의 조건 하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따라가지만 어떤 사람은 따라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최종 해결책이 제안된 나라들의 교훈은 대부분의 지역에서 '그 일이 일어날 수 있었지만' 그 일이 어디서나 일어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이 지구가 인간이 거주하기에 적합한 장소로 남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지도 않고 또 그 이상의 것이 합리적으로 요구되지도 않는다. 

p.323

이후 아이히만의 최종 언도가 나왔다. 정의에 대한 그의 희망들은 무산되었다. 비록 그가 최선을 다해 진실을 말했다 하더라도 법정은 그를 믿지 않았다. 그는 결코 유대인 혐오자가 아니었고, 그는 결코 인류의 살인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의 죄는 그의 복종에서 나왔고, 복종은 덕목으로 찬양된다. 그의 덕은 나치스 지도자들에 의해 오용되었다. 그리고 그는 지배집단의 일원이 아니었고, 그는 희생자였으며, 오직 지도자들만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는 다른 수많은 낮은 계급의 전범들만큼 그렇게 지나치지도 않았다. 그들은 '책임'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으며, 이제는 책임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 점을 설명해 달라고 소환할 수도 없다고 강력하게 불만을 제기했다. 그런 사람들은 자살이나 교수형을 당함으로써 자기들을 '떠나거나, 내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괴물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만들어졌을 뿐이다." "나는 오류의 희생자이다"라고 아이히만은 말했다. 그는 '희생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세르바티우스가 한 말을 확인해주었다. 그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의 행위를 대신해서 고통받아야 한다는 그의 깊은 확신'이었다. 이틀 후인 1961년 12월 15일 금요일 아침 9시에 사형이 선고되었다. 

p.343

그러고는 그는 "잠시 후면, 여러분,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이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고 말했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장례 연설에서 사용되는 상투어를 생각해 냈다. 교수대에서 그의 기억은 그에게 마지막 속임수를 부렸던 것이다. 그의 '정신은 의기양양하게 되었고', 그는 이것이 자신의 장례식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p.349

아이히만의 경우 성가신 점은 바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다는 점,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이 도착적이지도 가학적이지도 않다는 점, 그리고 그들은 아주 그리고 무서울 만큼 정상적이었고 또 지금도 여전히 정상적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상 인류의 적인 이러한 새로운 유형의 범죄자는 자기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거나 느끼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상황에서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p.379

나는 재판에 직면한 한 사람이 주연한 현상을 엄격한 사실적 차원에서만 지적하면서 악의 평범성에 대해 말한 것이다. 아이히만은 이아고도 맥베스도 아니었고, 또한 리처드 3세처럼 "악인임을 입증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그의 마음과는 전혀 동떨어져 있는 일이었다.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어떠한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상관을 죽여 그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살인을 범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문제를 흔히 하는 말로 하면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로 하여금 경찰심문을 담당한 독일계 유대인과 마주앉아 자신의 마음을 그 사람 앞에 쏟아부으며 어떻게 자기가 친위대의 중령의 지위밖에 오르지 못했고 또 자기가진급하지 못한 것이 자기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또다시 설명을 하면서 4개월 동안 앉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같은 상상력의 결여 때문이었다. 원칙적으로 그는 이 모든 일의 의미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법정에서 있었던 최후 진술에서 그는 "[나치] 정부가 처방한 가치의 재평가"에 대해 말한 것이다.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였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평범한' 것이고 심지어 우스꽝스러운 것이라면, 만일 이 세상의 최고의 의지를 가지고서도 아이히만에게서 어떠한 극악무도하고 악마적인 심연을 끄집어내지 못한다면, 이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것과 아직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죽음을 눈 앞에서 둔 사람이, 더구나 교수대 아래 서 있는 사람이 자신이 생전에 장례식장에서 들었던 것 외에 생각해 낼 수 없었다는 것은, 그리고 이러한 '고상한 말'이 자기 자신의 죽음이라는 현실을 완전히 모호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은 분명코 아주 일상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처럼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과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교훈이지 현상에 대한 설명도 아니고 그에 대한 이론도 아니다.

p.391

우리는 아이히만이 최종 해결책의 기계에서 단지 하나의 '작은 톱니바퀴의 이'에 불과했다는 변호인 측의 저항을 들었고, 또 아이히만이 실제의 원동력임을 발견했다고 믿는다는 검찰 측의 저항을 들었다.

...법원은 판결문에서 그런 범죄는 정부의 재원을 이용한 거대한 관료제에 의해서만 저질러질 수 있다는 점을 당연히 인정했다. 그러나 그것이 범죄인 한 그 기계의 모든 톱니바퀴의 이들은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상관없이 법정에서는 즉시 범죄의 수행자, 즉 인간으로 변형된다. 만일 피고가 자기는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단순한 기능인으로 행동했고 그 기능은 다른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마찬가지로 쉽게 수행될 수 있었다는 근거로 변명하려 한다면, 그것은 마치 범죄자가 범죄 통계표를 가리키며 자기는 통계적으로 기대되는 것을 했을 뿐이라고, 무엇보다도 누군가가 그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자기가 그렇게  하고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단지 우연일 뿐이라고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p.393

이러한 모든 상투어들은 판단을 불필요한 잉여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러한 것을 말하면 모든 위험을 모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p.403

이 보고서는 예루살렘 법정이 정의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는가라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다루고 있지 않다.

p.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