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틈
에로스의 종말 | 한병철 본문
"타자는 오직 할 수 있을 수 없음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사랑의 경험은 불능에 의해 만들어지며, 불능은 타자의 완전한 현현을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인 것이다.
p.8
사랑이 종말에 이른 이유는 오늘날의 세계가 규격화되고 자본화된 "동일성의 지옥"이기 때문이라는 것. 여기서 저자가 보여주는 분석은 대단히 심오하다. 이에 따르면 자본주의가-특히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만들어내는 장벽, 경계, 배제는 차이의 효과가 아니라 동일성의 효과다. "돈은 모든 것을 원칙적으로 동일하게 만든다. 돈은 본질적 차이들을 지우며 평준화한다. 새로운 경계는 배제하고 쫓아내는 장치로서, 타자에 대한 환상을 철폐한다."
p.10
에로스는 강한 의미의 타자, 즉 나의 지배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를 향한 것이다. 따라서 점점 더 동일자의 지옥을 닮아가는 오늘의 사회에서는, 에로스적 경험도 있을 수 없다. 에로스적 경험은 타자의 비대칭성과 외재성을 전제한다. 연인으로서의 소크라테스가 아토포스atopos라고 불리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내가 갈망하는 타자, 나를 매혹시키는 타자는 장소가 없다.
p.18
푸코는 역시 신자유주의적인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규율사회에 살고 있지 않으며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 더 이상 복종적 주체는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하지만 그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가 정말로 자유롭지는 못하다는 것, 자기 자신을 착취하면서 자유롭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푸코는 신자유주의에 대해 긍정적 태도를 취한다.
p.30
에로스는 성과와 할 수 있음의 피안에서 성립하는 타자와의 관계다. '할 수 있을 수 없음'이 에로스에 핵심적인 부정 조동사다. 다르다는 것의 부정성, 즉 할 수 있음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나 있는 타자의 아토피아가 에로스적 경험의 본질적 성분을 이룬다.
...타자와의 성공적인 관계는 일종의 실패로 여겨진다. 타자는 오직 할 수 있을 수 없음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p.32
오늘날 사랑은 긍정화되고 그 결과 성과주의의 지배 아래 놓여 있는 성애로 변질된다. 섹시함은 증식되어야 하는 자본이다. 전시가치를 지닌 신체는 상품과 다를 것이 없다. 타자는 성애화되어 흥분을 일으키는 대상으로 전락한다. 우리는 이질성이 제거된 타자를 사랑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것을 다만 소비할 뿐이다. 그러한 타자는 성적인 부분 대상들로 파편화되기에 더 이상 하나의 인격성을 지니지도 못한다. 성적 인격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p.41
타자가 성적 대상으로 여겨질 때, 타자가 성적 대상으로 지각될 때, 부버가 말한 "근원거리"는 손상된다. 부버에 따르면 근원거리는 "인간의 원리"로 기능하며 타자성이 성립할 수 있는 초월적 전제를 이룬다. "근원거리 두기"는 타자가 하나의 대상, '그것'으로 전락하고 사물화되는 것을 막아준다. 성적 대상으로서의 타자는 더 이상 "너"가 아니다. 그러한 타자와는 어떤 관계도 맺어지지 않는다. "근원거리"는 타자를 그의 다름 속으로 놓아주는, 그 속으로 멀어지게하는 초월적인 예의를 창출한다. 그것은 바로 강한 의미에서 말 건네기를 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성적 대상을 부를 수는 있겠지만 그것에게 말을 건넬 수는 없다. 성적 대상에는 "얼굴"도 없다. 얼굴은 타자성, 즉 거리를 요구하는 타자의 다름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예의가, 예의바름이 바로 이격성이 사라져가고 있다. 즉 타자를 그의 다름이라는 면에서 경험하는 능력이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p.42
기억은 있었던 것을 그대로 다시 눈앞에 떠오르게 해주는 단순한 복원의 기관이 아니다. 있었던 것은 기억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기억은 앞으로 나아가는 살아 있는 서사적 과정이며, 이 점에서 데이터 저장 장치와 구별된다. 데이터 저장 장치와 같은 기술 매체는 있었던 것에서 모든 생명력을 빼앗아간다. 그것은 무시간적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세계는 전면적인 현재의 지배 속에 놓이게 된다. 전면적 현재는 순간을 폐기한다. 순간이 없는 시간은 그저 더해지기만 할 뿐, 더 이상 상황적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것은 클릭의 시간으로서, 결정과 결단을 알지 못한다. 순간은 사라지고 클릭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p.46
뒤에 가서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는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유와 이정, 독립을 갈망하는 그의 마음은 벌거벗은 삶에 대한 근심을 초월한다. 죽음을 두려워 하는 자는 이로 인해 타자에게 굴종하고 결국 노예가 된다. 그는 죽음의 위험 대신 노예 상태를 선택한다. 그는 벌거벗은 삶에 달라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신체적 우위에 있는 쪽이 꼭 투쟁의 승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결정적인 것은 오히려 "죽음의 능력"이다. 죽음을 향한 자유를 알지 못하는 자는 자신의 삶을 걸지 못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데리고 죽음에까지 가는" 대신에 "죽음의 내부에서 자기 자신에게 머물러 있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노예가 되고 일을 한다.
p.52
현대의 노예는 자주성과 자유보다 건강을 더 중시한다. 그는 니체가 말한 최후의 인간, 즉 건강 자체를 절대적 가치로 여기는 인간과 흡사하다. 건강은 최후의 인간에게 "위대한 여신"으로 떠받들어진다. "사람들은 건강을 추앙한다. '우리는 행복을 발명했다.' 최후의 인간들은 이렇게 말하며 눈을 꿈뻑거린다." 벌거벗은 삶이 신성시될 때, 신학은 치료법으로 대체된다.
p.53
좋은 삶은 자본주의의 목표가 아니다. 축적과 성장을 향한 자본주의의 강박은 바로 죽음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진다. 자본주의에서 죽음은 절대적 저항으로 이어진다. 자본주의에서 죽음은 절대적 손실일 뿐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순수한 영리 행위는 좋은 삶이 아니라 단순히 삶 자체에만 매달리기 때문에 비도덕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p.55
"모델, 포르노스타, 그 외 모든 프로 전시꾼이 무엇보다도 먼저 습득해야 할 것은 바로 뻔뻔한 무관심함이다. 내보이는 것 자체 외에는 아무것도 내보이지 않는다는 것. 이렇게 해서 얼굴은 전시가치로 가득 채워져 터질 지경이 된다.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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