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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 한병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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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 한병철

prs21 2016. 9. 10. 15:29




[투명사회]


투명성이 신뢰를 낳는다. 이것이 요즘 유행하는 믿음이다. 이때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것은 하필이면 신뢰가 급격하게 의미를 잃어가고 있는 사회에서 투명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대단히 높아졌다는 사실이다.

p. 5


전면적 커뮤니케이션과 전면적 네트워크화의 흐름 속에서 아웃사이더가 되는 것, 튀는 견해를 밝히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어려워졌다.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은 매끈하게 다듬고 평준화하는 작용을 하여, 결국 획일화를 초래하고 이질성을 제거한다.

p. 6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

나는 그것으로 살아간다.

- 페터 한트케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조차 투명하지 않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자아는 무의식이 거침없이 긍정하고 갈망하는 것을 부정한다. "이드(id. Es)"는 자아에게 거의 감추어져 있다. 그러니까 인간 정신은 균열되어 있으며, 이로 인해 자아가 자신과의 일치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이런 근원적 균열 때문에 인간은 자신에 대해 투명해질 수 없다. 

p. 17


사실 권력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니다. 권력은 많은 경우 생산적이고 생성적으로 작용한다. 권력은 정치적으로 사회를 개조해가는 데 필요한 자유로운 여유 공간을 창출한다. 

...왜 인간에게는 권력을 행사하려는 성향이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 푸코는 쾌락경제에 관한 언급으로 답하고 있다.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자유로울수록 다른 사람의 행동을 결정하는 데서 오는 쾌락은 그만큼 더 크다는 것이다.

p. 43


미는 필연적으로 베일과 가림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노출시킬 수 없는 것이다. 가려진 것은 오직 가려져 있을 때만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한다. 폭로는 가려진 것을 없애버린다. 따라서 벌거벗은 아름다움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p. 49


벤야민이 아름다움의 대척점에 놓은 숭고함에는 어떤 전시가치도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전시로 인해 피조물의 숭고함은 파괴된다. 숭고함은 제의가치를 생산한다.

p.50


바르트는 사진의 두 가지 요소를 구분한다. 첫번째 요소를 그는 "스투디움studium"이라고 부른다. 탐구해야 할 광대한 정보의 영역과 "시름없는 소망, 방향 없는 관심, 일관성 없는 기호-좋다/싫다-의 영역이 여기에 해당된다. 스투디움은 '사랑하다'가 아니라 '좋아하다'의 범주에 들어간다. '좋아요/실허요'가 스투디움의 판단 형식이다. 스투디움에서 격렬함이나 열정 같은 것은 전혀 없다. 두번째 요소인 "푼크툼punctum"은 "스투디움"을 깨뜨린다. 그것은 호감이 아니라 어떤 상처, 격한 감동, 당혹감을 낳는다. 단조로운 사진은 푼크툼이 없는 사진이다. 그것은 스투디움의 대상일 뿐이다. 

p.57


오늘날 모든 미디어의 이미지들은 어느 정도 포르노적이다. 호감을 자아내는 미디어의 이미지들에는 어떤 푼크툼도, 어떤 기호적 강렬함도 없다. 그것들은 우리의 마음을 흔들지 못하고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지도 못한다. 그것들은 기껏해야 '좋아요'라는 코멘트의 대상일 뿐이다.

p.59


계산과는 반대로 사유는 자신에 대해 투명하지 않다. 사유는 예측된 경로를 따라가지 않고 미확정적인 공간으로 나아간다. 헤겔에 따르면 사유에는 일정한 부정성이 내재하는데, 이러한 부정성으로 인해 사유는 자신을 변모시키는 경험을 하게 된다. 스스로 달라진다는 부정적 특성은 사유를 구성하는 본질적 측면이다. 이 점에서 사유는 언제나 동일한 상태로 머물러 있는 계산과 구별된다. 계산의 동일성은 가속화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조건이다. 

p.65


행렬과 반대로 프로세서는 아무것도 이야기하지erzahlen 않는다. 프로세서는 오직 셈할zahlen뿐이다.

p.66


소셜미디어와 개인화된 검색엔진은 네트워크 내에 외부가 제거된 절대적인 인접 공간을 수립한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을 닮은 사람들을 만난다. 여기에는 변화를 가능하게 할 어떤 부정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디지털 이웃 사촌의 공간은 참여자에게 마음에 드는 세계의 단면만을 제공하며, 그럼으로써 공론장, 공적 영역, 비판적 의식을 해체하고 세계를 사적인 장소로 만들어버린다. 인터넷은 친밀성의 영역, 혹은 아늑한 지대로 변모한다. 모든 먼 것이 제거된 가까움 역시 투명성의 한 가지 표현 형식이다. 

p.74


개인person(라틴어persona)의 본래 의미는 가면이다. ...사람들은 오히려 서로에 대해 거리를 유지할 때 더 잘 어울리게 된다. 반면 친밀성은 사람들 사이의 교류를 불가능하게 한다. 

p.75


나르시시즘은 자기 자신과의 거리 없는 친밀성, 즉 자신에 대한 거리의 부재에서 온다. 친밀사회의 거주민은 나르시시즘적 친밀성의 부재에서 온다. 친밀사회의 거주민은 나르시시즘적 친밀성의 주체들로서, 이들에게는 연극적 거리두기의 능력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경험은 타자와의 만남이다. 반면 체험 속에서 인간은 언제나 자기 자신만을 볼 뿐이다.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계를 한정하지 못한다. 그에게 현존재의 경계는 흐릿하다. 그런 까닭에 안정적인 자아의 이미지도 생겨나지 못한다.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자기 자신과 너무나 밀착되고 융합되어버려서, 그에게 자기 자신을 데리고 노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울해진 나르시시스트는 자기 자신에 대한 못한한 친밀성 속에서 익사한다. 나르시시스트에게 자기와 거리를 두게 해주는 공허와 부재의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p.76


플라톤적 진리의 세계와는 반대로 오늘의 투명사회에는 형이상학적 긴장을 품고 있는 저 신성한 빛이 존재하지 않는다. 투명성에는 초월성이 없다. 투명사회는 빛이 없어 속이 비친다. 투명성은 어둠을 밝혀주는 빛의 원천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투명성의 매체는 빛이 아니라 빛이 없는 방사선이다. 방사선은 발기는 대신 모든 것을 꿰뚫고 들어가 속이 훤히 비치게 만든다. 방사선은 빛과 반대로 투과하고 관통한다. 또한 형이상학적 빛이 위계질서와 구별을 생성하고 이로써 질서와 방향성을 창출한다면, 방사선은 모든 것을 동질화하고 평준화한다. 


투명사회는 정보사회다. 정보는 어떤 부정성도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투명성의 현상이다. 정보는 긍정화되고 조작 가능하게 만들어진 언어다.

p.82


투명사회에는 진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가상도 없다. 진리도, 가상도 투명하지 않다. 완전히 투명한 것은 공허뿐이다. 이 공허를 제거하기 위해 대량의 정보가 유통된다. 

...더 많은 정보와 커뮤니케이션만으로 세계를 밝힐 수는 없다. 투명성도 눈을 밝게 해주지는 못한다. 정보의 무더기가 진리를 낳는 것은 아니다. 더 많은 정보가 방출될수록 세계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진다. 과다 정보와 과다 커뮤니케이션은 어둠 속에서 빛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p.85


투명사회 전체에 디지털 바람이 불고 있다. 그런데 투명성의 매체인 디지털 네트워크는 어떤 도덕적 명령에도 예속되지 않는다. 

...디지털 투명성은 또한 세계를 경제적 파놉티콘으로 만든다.

p.92


벤담의 파놉티콘에 갇힌 수감자들이 감독관의 지속적인 현존을 의식한다면, 디지털 파놉티콘의 주민들은 자유롭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다. 

p.95


신뢰 위에 세워진 사회에서는 투명성에 대한 집요한 요구가 생겨나지 않는다. 투명사회는 불신과 의심의 사회, 신뢰가 줄어들기에 통제에 기대려는 사회다. 투명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진 것은 사회의 도덕적 기반이 취약해졌다는 것, 진실성이나 정직성과 같은 도덕적 가치가 점점 더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p.98


오늘날 세계 전체가 하나의 파놉티콘으로 발전한다. 파놉티콘의 외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파놉티콘은 전체가 된다.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벽은 없다. 자유의 공간을 자처하는 구그로가 소셜네트워크는 파놉티콘적 형태를 취해간다. 오늘날 감시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자유에 대한 공격"이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 스스로 자발적으로 파놉티콘적 시선에 자기를 내맡긴다. 사람들은 자기를 노출하고 전시함으로써 열렬히 디지털 파놉티콘의 건설에 동참한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수감자는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다. 여기에 자유의 변증법이 있다. 자유는 곧 통제가 된다.

p101




[무리 속에서_ 디지털의 풍경들]


디지털 무리는 그 속에 영혼, 정신이 없다는 점에서 이미 군중과 다르다. 영혼은 모여들고 통합되는 성질이 있다. 반면 디지털 무리는 고립된 여러 개인으로 이루어진다. 군중의 구조는 이와 전혀 다르다. 군중은 개개인으로 환원되지 않는 특성을 드러낸다. 

...디지털 무리는 하나의 목소리로 표출되지 않는다. 악플도 하나의 목소리는 아니다. 그 때문에 악플은 소음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p.129


하지만 호모 디기탈리스homo digitalis는 결코 "아무도 아닌" 존재가 아니다. 그는 무리의 일부로 등장할 때조차 자신의 개인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익명으로 나타나지만 대개 일정한 특징profil을 지니며 그것을 최상의 상태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는 "아무도 아니"기는커녕 누군가로서 스스로를 전시하며 주목받고자 애쓴다. 반면 아무도 아닌 매스미디어의 인간은 자신에게 주목해줄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지워져 있다. 그는 군중 속에 녹아들어간다. 그것은 그의 행운이기도 하다. 그는 아예 아무도 아니기 때문에 익명일 수도 없다. 반면 호모 디기탈리스는 아주 익명으로 등장하지만 아무도 아닌 것은 아니다. 그는 누군가이다. 익명의 누군가인 것이다. 

p.130


인터넷의 디지털 주민은 집결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하나의 우리를 생성해낼 수 있는 집회의 내면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집결하지 않는 특별한 양상의 군집, 내면이 없는 무리, 영혼과 정신이 없는 무리다. 그들은 무엇보다 고립된 채 혼자 모니터 앞에 앉아 있는 히키코모리다. 라디오와 같은 전자 매체가 사람들을 집결시킨다면, 디지털 매체는 사람들을 따로 떼어놓는다. 

p.131


행동을 함께하기로 결단한 군중만이 권력을 산출한다. 군중은 권력이다. 디지털 무리에서는 이러한 결연함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행진하지 않는다. 디지털 무리는 갑자기 생겨났다가 갑자기 사라진다. 이러한 휘발성에서는 정치적 에너지가 나올 수 없다. 악플 역시 비재적인 권력관계를 동요시키지는 못한다. 악플은 그저 개개인에게 달려들어 망신을 주고 추문에 빠뜨릴 뿐이다.

p.132


계급에 대한 논의는 오직 계급의 다수성이 전제되는 한에서만 유의미하다. 하지만 다중은 유일한 계급이다. 자본주의 체제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다중에 속한다. 제국은 다중을 착취하는 지배 계급이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사람들은 자유의 환각 속에서 자기 스스로를 착취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성과주체는 착취자인 동시에 피착취자다. 하트와 네그리는 타자 착취보다 훨씬 더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이 자기 착취의 논리를 알지 못하는 듯하다. 제국에서는 아무도 지배하지 않는다. 제국은 모두를 뒤덮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다. 이렇게 오늘날에는 지배 없는 착취가 가능해진 것이다.

p.134


신자유주의적 경제주체들은 행동을 함께할 수 있는 '우리'를 형성하지 못한다. 사회가 점차 원자화되고 자기중심주의가 강화되어감에 따라 행동을 함께할 수 있는 여지는 급격히 축소되며, 이로써 자본주의 질서를 정말로 위협할 수 있는 반대 세력의 형성도 어려워진다. 공동체soxius는 단독자solus에 밀려난다. 다중Multitude이 아니라 고독Solitude이 오늘의 사회 상황을 특징짓는다. 사회의 전 영역에서 함께하는 태도, 공동체적인 정신이 무너져가고 있다. 연대 의식은 희귀해진다. 사유화 과정은 영혼 깊은 곳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 공동체적 정신의 침식으로 인해 공동의 행위가 이루어질 가능성은 날이 갈수록 희박해진다.

p.134


투명성의 독재 속에서는 주류에서 벗어나는 의견이나 일반적이지 않은 아이디어는 아예 입 밖으로 꺼내기도 어려워진다. 과감한 도전은 거의 시도되지 않는다. 투명성의 명령은 강력한 순응에의 강제를 낳는다. 사람들은 카메라의 지속적인 감시 속에 있을 때처럼 관찰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투명성의 명령에는 파놉티콘적 효과가 있다. 그것은 결국 커뮤니케이션의 획일화와 동일한 것의 반복으로 귀결된다.

P.141


무엇에서 정신의 위기를 인식하느냐는 질문에 뷔토르는 이렇게 대답한다. "지난 십 년 혹은 이십 년 동안 문학에서는 거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책은 홍수처럼 출간되지만 정신은 정지 상태입니다. 원인은 커뮤니케이션의 위기에 있습니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경탄할 만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엄청난 소음을 만들어냅니다." 정신의 매체는 고요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고요를 파괴한다. 커뮤니케이션의 소음을 만들어내는 디지털 매체의 가산적 특징은 정신의 걸음걸이와는 거리가 멀다.

p.143


커뮤니케이션에서 언어의 비중은 매우 작다. 몸짓이나 얼굴 표정과 같은 비언어적 표현 형식이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에서 더 본질적이다. 이러한 요소로 인해 커뮤니케이션은 촉각적 특징을 띄게 된다. 여기서 촉각성이란 단순히 신체 접촉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각뿐만 아니라 다른 감각들도 관련되어 있는 인간 지각의 다차원성과 다층성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디지털 매체는 커뮤니케이션에서 촉각성과 육체성을 제거해버린다. 

p.145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의 효율성과 편리함 때문에 우리는 점차 진짜 인간과의 직접적인 접촉, 실재와의 접촉 자체를 피하게 된다. 디지털 매체로 인해 진짜 상대방을 마주하는 일은 점점 더 드물어진다. 디지털 매체는 실재를 저항으로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점점 몸과 얼굴을 잃어버린다. 디지털은 라캉이 말한 실재계, 상상계, 상징계의 삼원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조한다. 디지털은 실재계를 해체하고 모든 것을 상상계로 만든다. 스마트폰은 유아기 이후에 거울 단계를 새롭게 재생시키는 디지털 거울로 기능한다. 스마트폰은 내가 나를 품는 나르시시즘적 공간, 상상적인 것의 영역을 열어준다. 스마트폰을 통해 말을 건내오는 것은 타자가 아니다.

p.146


예전에는 더 많은 시선, 사르트르가 말하듯이 타자의 출현을 알리는 시선이 있었다. 사르트르에게 시선은 인간의 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세계 자체를 시선이 있는 존재로 경험한다. 시선으로서의 타자는 도처에 있다. 사물은 우리를 쳐다본다. "물론 시선이 출현하는 가장 흔한 경우는 의심의 여지 없이 두 개의 눈이 나에게 향할 때이다. 그러나 시선은 나뭇가지의 사각거림에서도, 정적 뒤에 오는 발소리에서도, 반쯤 열려 있는 창의 덧문에서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p.148


스카이프에서는 서로 눈을 맞추는 것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모니터 속 상대의 눈을 보고 있으면 상대는 우리가 약간 아래쪽을 보고 있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카메라가 모니터 위쪽 가장자리에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바라보는 것이 언제나 누구에게 바라보이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되는 직접 대면의 멋진 특징은 사라진다. 스카이프의 시선은 비대칭적이다. 스카이프 덕택에 우리는 하루 24시간 내내 가까이 있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줄곧 서로 다른 데를 쳐다보고 있는 셈이다." 서로 다른 데를 보고 있어야 하는 이유는 비단 카메라의 각도 때문만은 아니다. 문제는 오히려 시선의 근원적인 부재, 타자의 부재에 있다. 디지털 매체는 우리에게서 점점 더 타자를 빼앗아간다. 

p.148


이른바 파리 신드롬은 대체로 일본인 관광객에게 찾아오는 급성 심리 장애다. 환자는 환각, 현실감 상실, 이인증離人症, 불안 등에 시달리며, 현기증, 발한, 격렬한 심장박동과 같은 심신상관적 증세를 나타낸다. 파리 신드롬을 촉발하는 것은 일본인들이 여행 전에 파리에 대해 품은 이상적 이미지와 이 이미지에서 한참 동떨어져 있는 도시의 현실 사이의 격차다. 그렇다면 강박적으로, 거의 히스테리컬하게 사진을 찍어대는 일본인 관광객의 형태는 이미지를 통해 끔찍한 실재를 몰아내려는 무의식적인 방어 반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사진이 보여주는 이상적 이미지가 그들을 더러운 현실에서 지켜주는 것이다.

p.153


바르트는 아날로그 사진에서 시간의 부정성을 본질적 구성 요소로 하는 생의 형식을 발견한다. 반면 디지털 이미지, 디지털 매체는 이와는 다른 생의 형식과 결부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성장과 노화, 탄생과 죽음이 모두 지워져 있다. 영구적인 현존과 현재가 디지털 매체의 특징이다. 디지털 이미지는 피어나지도 광채를 발하지도 않는다. 피어남에는 시듦의 부정성이, 광채에는 그림자의 부정성이 기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p.156


역사를 위한 동사는 행동하다handeln이다. 한나 아렌트는 행동을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능력, 즉 뭔가 새로운 것, 완전히 다른 것이 시작되게 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이해하면서, 태어남Natalitat을 행동을 위한 존재론적 조건으로 끌어올린다. 모든 탄생은 새로운 시작에 대한 약속이다. 행동한다는 것은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게 한다는 것이다. 자동적 과정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행동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의 능력은 "신뢰"와 "희망"의 바탕이 된다. 

p.158


"손 없이 손가락질만 하는 미래의 인간", 즉 호모디기탈리스는 행동하지 않는다. "손의 위축증"으로 인해 인간은 행동 능력을 상실한다. 뭔가를 손질하고 다듬는 것은 일정한 저항을 전제한다. 행동 역시 저항을 극복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 행동은 기존의 지배적인 힘에 새로운 것, 다른 것을 맞세우는 일이다. 행동에는 부정이 내포되어 있다. 행동은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추구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다른 무언가에 대한 반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의 긍정사회는 모든 저항적 형식을 회피하며, 이로써 행동을 소멸시킨다. 이 사회 속에는 그저 동일한 것의 다양한 상태들만 있을 뿐이다.

p.161


"디지털"이라는 단어는 본래 손가락이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digitus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세는zahlen 손가락이다. 하지만 역사는 이야기Erzahlung다. 역사는 세지 않는다. 셈Zahlen은 포스트역사적 범주다. 트윗도 정보도 하나의 이야기로 통합되지 않는다. 타임라인도 삼의 역사 또는 전기를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타임라인은 서사적이기보다 가산적이다. 디지털 인간은 끊임없이 세고 계산한다는 의미에서도 손가락질하는 인간이다. 디지털은 수와 셈을 절대화한다. 페이스북 친구들도 무엇보다 숫자로 세어진다. 하지만 우정은 이야기다. 디지털 시대에는 가산적인 것, 셈하기, 셀 수 있는 것이 전부가 된다. 심지어 애착과 호감도 '좋아요'의 형식으로 세어진다. 서사적인 것은 급격히 의미를 상실한다. 오늘날 모든 것이 셀 수 있게 가공된다. 그래야만 성과와 효율성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셀 수 없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p.164


고통이 없고, 타자의 부정성이 없고, 긍정성만 과다한 경우에 경험은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어디나 돌아다니지만 경험에는 이르지 못한다. 사람들은 끝없이 수를 세지만 이야기할 줄은 모른다. 사람들은 온갖 것에 대한 정보를 얻지만 어떤 깨달음을 얻지는 못한다. 타자에 직면할 때 찾아오는 문턱의 감정, 즉 고통은 정신의 매체다. 정신은 고통이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고통스러운 삶via dolorosa을 묘사한다. 반면 디지털의 현상학은 정신의 변증법적 고통과 무관하다. 그것은 좋아요의 현상학이다. 

p.187


사물 인터넷Internet of Things은 새로운 유령을 낳는다. 한 때 침묵하던 사물들이 말을 하기 시작한다. 인간의 작위 없이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사물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은 유령들에게 새로운 양분을 제공한다. 이로써 세계는 더욱 유령 천지가 된다. 사물들의 자동적 커뮤니케이션은 마치 유령의 손에 조종되는 듯이 보인다. 디지털 유령들은 언젠가 모든 것이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지는 사태를 초래할지도 모른다.

p.1910


정보피로증후군(IFS: Information of Fatigue Syndrome)은 정보의 과다에서 오는 심리 질환이다. 환자들은 분석적 능력의 저하, 주의산만증, 전반적인 불안감,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는 무기력감을 호소한다. 1996년에 영국의 심리학자 데이비드 루이스가 이 개념을 만들었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IFS는 직업상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양의 정보를 다루어야 하는 사람들의 질병이었다. 오늘날은 모두가 IFS의 희생자다. 그 이유는 우리 모두가 미친 듯이 늘어나는 정보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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