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틈
도덕교육의 파시즘 | 김상봉 본문
* 현행 도덕교육의 문제점
현재 시행되고 있는 도덕교육의 내용과 체제는 1980년대 초 전두환 정권이 만든 작품이다.
...그런데 전두환 정권은 체제유지를 위해 도덕교육의 성격과 목표를 보다 분명히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1981년 서울대에 국민윤리교육과를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전국 각 대학에 국민윤리교육과를 신설하였다.
p.11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 결정적인 점에서 현재의 도덕교육은 외관상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시대 이래 한 걸음도 진보하지 못했으며 그 때문에 지금까지의 도덕교육은 이제 폐지되어야 하며, 참된 도덕교육이라는 새 술을 새로운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한 가지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지금까지의 도덕교육이 참된 자유인이 아이라 노예를 기르기 위한 것이었을 뿐, 한 번도 긍지 높은 자유인을 기르기 위한 도덕교육이었던 적이 없었다.
p.13
그러나 도덕의 현상이 당위나 강제의 형식을 띄고 있다 해서 그것이 반드시 외적 강제나 타율적 강제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같은 강제라도 도덕적 강제가 의지의 자기강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도덕적 강제가 타자가 나에게 강요하는 타율적 강제가 아니라 내가 나 스스로 자신에게 부과하는 강제라면, 그것은 노예적인 굴종이 아니라 도리어 인간의 근원적인 자유의 표현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도덕은 본능적 욕망의 형식으로 나의 의지를 구속하려는 자연적 강제에 대한 저항의 표현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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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율적 강제에 길들여진 노예든 자율적인 자기절제가 습관화된 자유인이든 결과적으로 도덕적 규범을 어기기 않는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런 외적 현상의 무차별함이 사람들로 하여금 노예적 길들여짐과 참된 도덕적 성숙을 구별없이 혼동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앞의 경우는 기본적으로 외적 억압에 의한 단정함이므로 억압이 사라지면 언제라도 사라질 수 있는 단정함이지만, 뒤의 경우는 자기 자신의 오랜 성찰과 반성의 과정에서 형성된 단정함이므로 외적 조건의 변화에 의해 쉽게 흔들리는 것이 아니다.
p.21
* 저자의 도덕관
인간의 도덕적 능력이란 이처럼 실현되어야 할 과제로서의 인간성, 곧 당위로서의 인간성의 이상을 스스로 정립하고 스스로 추구하며, 스스로 실현할 수 있는 능력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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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법에 기대어 인간이 추구하는 객관적 목적의 표상을 선이라 부른다면, 그 선을 스스로 정립하고 실현하는 주체의 실천적 자기규정의 능력을 곧 덕이라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이처럼 덕이 자기를 스스로 규정할 수 있는 능력에 존립하는 한에서 덕은 곧 자유의 능력이다.
...우리 모두는 오직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자기 속에 숨겨져 있는 자유의 능력을 현실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교육이란 바로 이 만남을 가리키는 이름에 다름 아닌 것이다.
... 그 중에서도 도덕교육은 같은 자유의 능력이라도 좁은 의미에서 이성적 사유의 능력이 아니라 실천적 자기정립과 자기규정의 능력을 기르는 데 존립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오직 우리 속에서만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자기실현은 나의 자기실현이 아니라 우리의 자기실현 속에서만 온전히 수행될 수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에 대한 관심은 고립된 나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동시에 너에 대한 관심이며 마지막에는 반드시 우리에 대한 관심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가 말하는 좁은 의미에서 도덕적 관심 또는 도덕감이란 바로 이처럼 너와 우리에 대한 관심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전인교육이 수행해야 할 도덕교육은 학생들로 하여금 타인과의 만남 속에서 이상적 공동체를 추구하고 그 속에서 자기를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하는 교육인 것이다.
p.24
그런데 우리의 근대화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였다. 이것은 우리가 자주적으로 근대적 국민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을뿐만 아니라 개인의 자유로운 주체성 역시 폭력적 지배체제 아래서 억압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행하게도 이런 사정은 해방이 되고 나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제국주의자들이 떠난 자리를 차지한 것은 독재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의무는 의지에 대한 강제를 내포한다. 현실에서 의지에 대한 강제는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나는데 그 하나가 법이고 다른 하나가 도덕이다. 그런데 법은 명료하고 효율적이기는 하지만 복종하는 사람들의 자발성을 이끌어내지 못할 때에는 언제라도 시민의 저항에 직면할 위험을 안고 있다.
...그러므로 권력을 권리로 만들고 그 권력에 대한 복종을 의무로 만들기 위해서는 법의 구속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반드시 도덕적 훈육을 통하여 사람들을 세뇌하고 길들여 그들로 하여금 법을 통해 강제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권력에 복종하도록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사람들을 아예 도덕적 의무의 형태로 권력에 순종하도록 만드는 교육이 바로 한국의 도덕교육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일본 제국주의자들도 군부독재도 존재하지 않는 지금은 어떠한가?
...유감스런 일이지만 현재 쓰이고 있는 도덕 교과서를 보면, 정치적 영역에서 독재자들이 물러난 지금까지도 우리의 의식 속에 뿌리내린 노예도덕의 뿌리는 전혀 근절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하여 한국의 도덕 교과서의 이데올로기를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우리는 그것을 주저없이 노예도덕과 파시즘이라 표현할 수 있다.
p.27
중학교 도덕 교과서를 지배하는 첫째가는 도덕적 원천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남을 위해 그리고 공동체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도덕 교과서가 가르치는 도덕은 자기를 위한 도덕이 아니라 남을 위한 도덕이다.
p.29
물론 이런 단원의 근저에 놓여 있는 관심은 명백히 갈등에 대한 혐오이다. 사회는 조용해야 한다. 갈등은 나쁜 것이고 통합은 좋은 것이다. 이것이 이 단원이 유포하는 이데올로기이다.
p.30
그러니까 삶의 보람을 말하든 자아실현을 말하든 결론은 언제나 마찬가지이다. 도덕 교과서는 끊임없이 "공동체의 발전과 복지증진에 기여"하는 것이 올바른 자아실현이며, 보람 있는 삶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학생들을 언제라도 타인과 공동체를 위해 자기를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으로 기르는 것이야말로 도덕 교과서가 가르치는 도덕의 존재이유이다.
p.32
물론 타인과 공동체를 위한 삶을 부도덕한 삶이라 비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타인을 위한 자기희생이 아무리 숭고한 것이라 하더라도 언제나 자기를 잊고 타인만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자유인이 아닌 노예를 위한 도덕이요, 언제나 개인의 이익보다 국가의 이익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것은 파시즘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유인의 존재를 '자기를 위하여 있음'이라고 간단히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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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게서 모욕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겁이 나서 그대로 당하고만 있는 것"도 양심의 가책을 부르는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니까 플라톤은 양심의 가책을 설명하면서 단순히 자기가 타인에게 불의한 일을 행하는 것만을 문제삼지 않고 타인이 자기에 대해 가하는 불의에 대해 저항하지 않는 것도 같이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타인에게 행할 수 있는 악을 멀리하는 것이 도덕적 의무인 만큼, 마찬가지로 타인이나 사회가 나에게 가하는 악에 저항하는 것 역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도덕적 의무인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도덕 교과서는 자기가 타인이나 사회에 대해 행할 수 있는 악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이 말하면서도 타인이나 사회 또는 국가에게 가할 수 있는 악에 저항해야 할 의무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말하지 않는다.
p.36
첫째로 현실적으로 정착되어 있는 불평등한 사회관계에서 아래에 있는 사람이 지켜야 할 도덕뿐만 아니라 위에 있는 사람이 지켜야할 도덕 역시 학생들이 배울 필요가 있다.
...학교교육이 다 그렇겠지만 도덕교육 역시 지금 당장 학생들을 지도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기보다는 나중에 학생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교육은 미래를 위한 준비인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도덕교육은 마치 학생들이 영원한 어린아이기라도 한 것처럼 오직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지켜야 할 예절은 가르쳐도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지켜야 할 에절은 가르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어떤 자식이 예의바른 자식이고 어떤 학생이 예의바른 학생인지를 배우기는 하지만 어떤 부모가 좋은 부모이고 어떤 선생이 좋은 선생인지를 전혀 배우지 못하고 어른이 된다. 이처럼 윗사람의 도리와 예절을 배우지 못하고 어른이 되는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윗사람으로서 무례하고 폭력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둘째로 도덕교육은 사회적 약자에게 예절을 강요하는 만큼, 사회적 강자의 폭력과 횡포에 대해 어떻게 자기를 지켜야 할지도 말해주어야 한다.
부모, 교사, 선배, 군대 등..
...이 나라에서 도덕적으로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무례한 것이 아니라 어디서나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가하는 횡포와 폭력인 것이다.
만약 도덕교육이 악을 물리치고 선을 추구하는 인간을 기르려 한다면, 하급자의 예절을 강조하는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상급자의 폭력에 대한 저항 역시 마땅한 도덕적 의물로서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반적으로 모든 사회적 악은 피해자들에의 방관과 침묵 및 굴종 속에서 독버섯처럼 창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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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도덕이 강요된 규범이 아니라 자유로운 의지의 표현이 되려면 도덕적 주체가 도덕적 당위를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느낄 수 있어야만 한다. 도덕교육의 중요한 과제는 학생들이 도덕적인 문제에 대해 스스로 느끼고 결단할 수 있는 자율적인 도덕적 능력을 길러주는 데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모든 도덕적 문제에 대해 어떤 대답이나 해결책이 밖으로부터 주어진다면, 그리고 학생들은 그렇게 주어지는 해답을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면, 그것은 타율적 도덕으로서 도덕교육을 노예교육으로 만드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한국의 도덕 교과서는 학생들에게 거의 아무것도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고 또 결단할 수 있는 여지를 허락하지 않는다. 첫째로 교과서는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주어진 질문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도록 유도하기보다는 언제나 가르치고 지시하려고만 한다. 기본적으로 도덕 교과서의 모든 서술이 마지막에 가서는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식의 명령과 당위로 이루어져 있다.
...둘째로 모든 도덕적 문제들에 대해서 불필요할 정도로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촘촘하게 모범답안을 먼저 제시한다.
p.41
사람들은 도덕을 이기심과 대립되는 것이라 생각하여 무조건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 도덕적 태도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도덕은 능동적이고 자유로운 의지의 발동으로서 언제나 강인하고 개성적인 주체성을 전제한다. 주체성의 본질은 자기반성으로서 자기에 대한 관심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한에서 타인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수 있다.
p.43
그러나 전반적으로 말해 도덕 교과서가 가장 중요한 헌신의 대상으로 가르치는 공동체는 인류가 아니라 국가와 민족이다. 이것부터가 파시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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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기실현은 언제나 사회적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내가 나를 형성하고 실현한다는 것은 내가 속한 언어와 역사 공동체인 민족과 국가를 더불어 형성해나감으로써 온전히 이루어지는 일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와 민족은 나에게 소중한 대상이다.
...그러나 도덕 교과서가 가르치는 국가는 그런 서로주체성의 실현태가 아니라 그 자신 홀로주체로서 군림하는 일종의 슈퍼에고로서의 국가이다.
p.46
모든 파시즘이 그러하듯 여기서도 교과서는 모호한 감성에 호소한다. 그러나 국가가 구체적 실체가 아닌 바에야 우리가 국가에 대해 사랑이든 마음이든 무슨 감정 같은 것을 가질 수가 있는겠는가?
...여기서 보듯이 교과서는 나라에 대한 자랑스러움으로부터 국가에 대한 개인의 의무감과 희생정신을 이끌어 내려 한다. 나라와 겨레를 위해 개인이나 집단의 희생을 감수하라는 국가주의, 전체주의적 윤리는 이처럼 한편에서는 모호한 가족 감정 혹은 혈연 감정에 의해서 다른 한편에서는 나라와 겨레에 대해 느끼는 자랑스러움에 의해 정당화된다. 이런 의미에서 도덕 교과서의 국가주의는 추성적으로 표현하자면 두 가지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데 그 하나가 가족주의이며 다른 하나가 극단적인 자민족 중심주의이다.
p.51
교과서에 따르면 모든 갈등은 부정적인 것이다. 생각하면 역사는 갈등을 통해 발전한다. 갈등이 없는 역사는 죽은 역사이다. 그러나 도덕 교과서는 전편에 걸쳐 질서와 조화의 이데올로기를 숭상하고 갈등을 무조건 위험시한다. 그리하여 어떤 갈등상황에 대해 도덕 교과서가 대처하는 방식은 언제나 천편일률적으로 역지사지하면서 서로 양보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과서는 갈등상황을 병리적인 상황으로 간주하면서 모든 갈등을 그저 역지사지의 자기양보를 통해 봉합하려 한다. 그 결과 교과서가 가르치는 윤리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기계적인 중용의 윤리이다.
p.55
여기서 보듯 갈등이 생겼을 때 끝까지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정신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저 하나같이 좋은 것이 좋다는 식의 화해만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적당히 타협할 것이 아니라 호주제 폐지나 국가보안법 폐지문제처럼 끝까지 싸워서 실현해야 할 가치도 있고 싸워서 얻어야 할 권리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 교과서가 가르치는 갈등해소의 방법이란 절충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리하여 양보하고 타협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무조건 나쁜 것으로 매도되고 공익과 질서를 거스르는 행위 역시 부도덕한 행위로 비난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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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온갖 갈등을 볼온시하는 태도는 법과 규칙에 대한 맹목적 순종의 강요로 나타난다. 도덕 교과서는 나라의 법은 말할 것도 없고 학교의 교칙까지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강요한다.
...따지고 보면 이런 교칙은 하나같이 인간의 기본권의 침해이다. 학생이 무슨 옷을 입든, 무슨 신을 신든, 어떤 머리를 하든 그것이 도대체 선,악의 문제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세상에 얼마나 많은 악법이 있는가? 스스로 동의한 법에 복종하는 것은 자율성의 표현이지만 남이 제정한 자의적 법칙에 따르는 것은 노예적인 굴종일 뿐이다.
...도덕 교과서는 크고 작은 법칙에 대해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할 뿐, 주어진 법칙이나 규칙에 대한 비판적인 검사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도덕 교과서는 법칙에 대한 맹목적 복종을 가르치는데, 이엇이야말로 전체주의의 전형적 특징인 것이다.
p.57
한다디로 표현하자면 현재 한국 도덕교육의 모든 문제는 도덕이 아닌 것이 도덕의 이름으로 강요된다는 데 있다. 도덕이 아닌 것이 도덕으로 행세하는 것을 가리켜 사람들은 위선이라 부른다. 한국의 도덕교육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거대한 위선의 체계이다.
p.63
그러나 과연 국가는 도덕의 주체일 수 있을만큼 도덕적인 공동체인가? 헤겔이 생각햇듯이 국가가 자유의 현실태로서 참된 도덕 공동체일 수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국가가 실제로는 전혀 도덕적인 공동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도덕의 주인이 되려 한다면, 그때 국가가 강요하는 도덕은 위선의 체계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하면 이것이야말로 현대 사회에서 도덕이 처한 가장 본질적인 위험이다.
p.64
누구도 모든 사람을 지속적으로 지배할 수 있을 만큼 강할 수는 없기 때문에, 권력은 물리적 힘만으로는 자기를 지탱할 수 없으며 반드시 지배를 위한 도덕적 정당성을 같이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통해 자기의 지배를 권리로 만들고 타인의 복종을 도덕적 의무로 만들 때, 비로소 권력은 안정성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권력의 정당화 논리를 통틀어 우리는 이데올로기라고 부를 수 있다. 권력이 정당성의 논리를 필요로 하는 한에서 이데올로기는 어떤 시대에나 있어왔다. 그런데 서양에서 근대 이전의 국가들을 살펴보면 국가권력은 이데올로기의 소비자였을 뿐 국가권력 자신이 이데올로기의 생산주체는 아니었다. 그러나 근대국가가 보편적 공교육의 주체가 되었을 때, 국가는 이데올로기의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보다 적극적인 생산주체로 발돋음하였다.
p.65
그리하여 근대 이후 국가가 이데올로기의 생산주체가 되었다는 것은 또한 그것이 도덕적 가치의 생산주체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근대 이전에 도덕적 가치를 규정하는 일은 국가가 아니라 철학자와 성직자들에게 맡겨진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최고의 도덕가는 국가이다. 국가는 도덕적 가치의 척도와 내용을 규정하고 그것을 제도교육을 통해 학생들에게 주입한다. 국가는 이제 도덕의 주인이다. 국가는 더 이상 철학자나 성직자들이 가르치는 도덕적 지침을 수동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도리어 철학자나 성직자들에게 국가가 정립하는 가치기준을 강제한다. 그리고 국가의 주문과 감독에 따라 생산된 도덕과 이데올로기를 공교육 체계를 통해 학생들의 마음속에 지울 수 없도록 새겨넣는다.
p.66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국가이다. 그리고 국가는 교육을 통해 자기가 설정한 가치를 보편적이고도 객관적인 가치의 척도로 정립한다. 이것이 근대적 공교육의 이면이다. 근대적 공교육은 한 국가 내의 모든 사람에게 배움을 통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스스로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었지만, 마찬가지로 국가가 개인의 정신세계를 통제하고 조작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어주었다. 히틀러와 스탈린의 국가는 그렇게 인간의 정신적 삶을 통제하는 근대국가의 전형이었다.
p.69
원래 도덕은 국가나 민족의 경계 안에 가둘 수 없다. 물론 역사적으로 보자면 도덕의 기원은 민족의 관습이었다. 이것은 서양에서 도덕을 뜻하는 말의 어원만을 살펴본다 하더라도 금방 알 수 있다. 모랄(moral)이든 에토스(ethos)든 모두 관습을 뜻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관습은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 집단적 공동생활의 단위가 다른 무엇보다 민족에 따른 것이었다면, 도덕은 민족의 요람에서 탄생한 것이 분명하다. 이는 고대 그리스에서 민족(ethos)과 도덕(ethos)을 뜻하는 낱말이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이라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도덕은 민족의 관습에서 유래했던 것이다.
그러나 도덕의 기원과 도덕의 정당성의 문제는 다른 문제이다.
...사람들은 대대로 전승되어온 미풍양속이 선 그 자체의 객관적 현실태라고 믿고 있지만, 관습이나 미풍양속은 민족에 따라 극단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 그리하여 어떤 민족에게는 선한 일이 다른 민족에게는 악한 일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도덕이 이처럼 상대적인 관습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 폭로되고 나면 도덕은 절대적인 위엄과 신성함을 지킬 수 없게 된다.
p.71
아리스토텔레스가 소크라테스를 가리켜 윤리학의 창시자라 부른 것은 그가 윤리와 도덕을 전통이 아니라 오로지 순수하고 보편적인 이성에 기초시키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 철학자들은 윤리와 도덕의 근거를 두고 다른 입장과 관점에서 다투어 왔으나, 그 모든 이론적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도덕과 윤리가 보편적 이성의 관점에서 근거지어져야 한다는 암묵적인 합의 자체가 부정된 적은 없었다. 만약 도덕이 보편적 타당성과 정당성에 대한 지향을 스스로 포기한다면, 그 순간 도덕은 주관적 욕망의 표현이 아니면, 맹목적 관습이 되어버린다.
...이런 의미에서 도덕은 국가나 민족의 테두리 안에 갇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도덕적 정당성은 오직 도덕의 보편성을 통해서만 검증될 수 있기 때문이다.
p.72
교과서에 따르면 현대 사회의 도덕적 가치의 위기는 "과학 지상주의와 개인주의, 그리고 쾌락주의"로부터 비롯된다. 이는 그 자체로서 독단적이며 파시즘의 혐의를 벗기 어려운 상황인식이다.
...과학 지상주의가 잘못인 것처럼 반공 지상주의나 국가 지상주의 또는 민족 지상주의나 종교 지상주의 역시, 아니 그 이상으로 위험한 사고방식이다. 그런데 교과서는 수많은 지상주의 가운데 하필 과학 지상주의를 비판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 과학적 합리성이 결여되어 있는 까닭에 문제가 생길지언정 과학적 합리성이 도를 지나쳐 생기는 문제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 교과서는 그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다만 아무런 현실적 문맥 없이 추상적으로 과학 지상주의가 도덕성이나 심미성 그리고 종교적 신념들을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것이라고 무시한다고 언성을 높일 뿐이다.
p.76
새마을 운동은 도덕적 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는 도덕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잘살아 보세'라는 욕망의 산물이다. 물론 거기에도 나름대로의 덕목이 있다. '근면,자조,협동'은 새마을 운동의 도덕, 곧 한국적 자본주의의 도덕이다. 잘살기 위해서는 근면하고 스스로 도와야 하며 서로 협동해야 한다! 그러나 이처럼 한 문장이 당위의 형식이나 명령의 형식을 띄고 있다 해서 그 모든 발언이 도덕적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칸트가 가르친 바 있다.
...칸트식으로 말하자면 저 명령은 일단 가언명령, 즉 조건명령이요, 순수한 도덕적 명령이라기보다는 영리함의 준칙에 속하는 것이다.
만약 네가 잘살기를 원한다면 너는 근면, 자조, 협동해야 한다! -이것이 새마을 운동의 명령이다.
p.81
마찬가지로 근면, 자조, 협동 역시 여러 가지 점에서 좋은 것이요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덕목 역시 그것을 사용하는 의지가 선하지 않다면 극단적으로 악하고 해로운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선량한 시민이 아니라 도둑이나 강도들을 위해서도 똑같이 필요하고 유익한 덕목이다. 도둑과 강도 역시 잘살기를 바란다는 점에서는 선량한 시민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p.85
생각하면 현재 한국 사회의 도덕적 파탄의 뿌리는 바로 새마을 도덕 같은 사이비 도덕과 참된 도덕이 전혀 구별이 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잘사는 것과 올바르게 사는 것을 구별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도리어 새마을 운동 열심히 해서 잘사는 것이 도덕적으로 훌륭한 일이라고 배우는 사람들이 어떻게 선과 악을 제대로 구별할 수 있겠는가? 자기를 잘 먹고 잘살게 해주는 사람이면 일본군 장교 출신의 친일파가 대통령이 되어 독재를 자행해도 그만이요, 자기들의 안락한 삶을 위해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라크에 군대를 보내 총질을 한다 해도 그만이다.
p.87
그런데 어떻게 해서 한국에서는 윤리학에 대해 최소한의 소양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도덕 교과서를 쓰는 일이 벌어지는가?
그것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한국의 도덕교육이 학문적 바탕을 전적으로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p.87
경제의 어미학문은 경제학이다. 그렇다면 도덕교과의 어미학문은 무엇인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도덕을 학문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은 일차적으로는 윤리학인데, 윤리학이란 철학의 한 분야이므로 도덕의 어미학문은 당연히 철학이라 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의 도덕교과는 어미학문이 없다. 그 대신 학제적 접근이라는 유령이 어미학문의 자리를 대신한다. 학제적 접근이란 여러 학문들이 같이 도덕교과의 어미학문 노릇을 한다는 말과 같은데 여기에 속하는 학문들이 "한국학, 철학 특히 윤리학을 비롯한 규범과학, 정치학, 사회학을 비롯한 사회과학" 그리고 "지도방법이나 평가면에서는 심리학과 교육학"이 도덕교과에 학제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그러니까 초중등학교에서 윤리도덕교과를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서는 여기서 언급된 저 많은 학문들을 다 충실하게 공부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그것도 대학 4년 동안!
p.88
도덕교육에 대한 독재정권의 왜곡된 관심은 전두환 정권에 이르러서는 1981년 서울대학교를 필두로 대학에 국민윤리교육과와 국민윤리학과라는 학과를 신설하고 이 학과 출신들에게만 도덕교육을 담당할 수 있는 자격을 허락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 이전에는 철학 관련학과와 종교 관련학과 그리고 교육학 관련학과가 도덕 교사를 양성할 수 있는 관련학과로 인정되고 있었던 까닭에, 도덕 교사 양성을 국가가 일관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국민윤리학과 및 국민윤리교육과를 신설하고 오직 이들만이 도덕교육을 담당하게 함으로써 도덕교육을 단지 학교 교육현장에서가 아니라 교사 양성 과정에서부터 철저히 통제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p.90
이런 사정이 지금에 와서도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서울대학교 국민윤리교육과의 교수 구성이다. 한국의 도덕 교과서 집필권을 독점하고 있는 이 학과의 전임교수 5명의 전공학문은 사회교육, 정치학(2명), 사회학, 철학이다. 그러니까 대학에서 국민윤리학과를 담당하고 있는 교수들의 전공을 살펴보기만 하더라도 우리는 한국의 도덕교육이 온전한 의미의 도덕교육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p.91
그러나 현재 한국의 도덕교육의 핵심 영역은 "인성 교육과 민주 시민 교육" 그리고 "통일 대비 교육과 국가 안보 교육"이다. 도덕교과의 존재 이유는 참된 도덕적 능력의 함양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교육에 있는 것이다.
p.91
하지만 한국의 도덕교육은 처음에는 독재정권에 의해 왜곡되었고 지금은 독재정권이 만든 국민윤리교육학 또는 윤리교육학이라는 혼성학과의 현실적인 기득권 유지를 위해 계속 왜곡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대답은 하나밖에 없다. 학생들의 도덕감을 계발하기는커녕, 인간의 타고난 천부적 도덕성을 왜곡하며, 참된 도덕을 모욕하고 웃음거리로 만드는 현재의 도덕교육은 하루빨리 폐지되어야만 한다. 한국의 도덕교육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자기의 뿌리와 정체를 숨기려 애쓴다 하더라도 그들은 자기의 얕은 학문적 수준과 불순한 욕망을 숨기지 못한다. 그들이 지향하는 도덕은 자조, 근면, 협동의 새마을 도덕이요, 그들이 꿈꾸는 공동체는 잘 먹고 잘사는 새마을 공동체이다. 이런 사이비 도덕으로부터 우리 아이들의 정신을 지키려면 우리는 이제 지금과 같은 도덕교육은 더 이상 안 된다고 말해야 한다.
...만약 도덕교육을 학교교육에서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학생들의 도덕성이 온전히 계발될 수 있다면 그 길을 가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도덕교육을 제거한다 해서 학생들의 도덕성이 계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도덕적 사유가 사라진다는 것은 삶의 궁극목적에 대해 사유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사유가 도구적 사유와 기능적 사유에 매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각각의 학문은 나름의 실천적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에 따라 학생들은 여러 교과목에서 제시하는 그런 실천적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가언명령 곧 조건적 요구들을 습득하게 된다.
...온전한 의미의 도덕교육이란 학생들로 하여금 윤리학적으로 생각하고 행위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교육이다. 그리고 그런 한에서 도덕교육은 제거되어서는 안 된다.
p.98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현재의 도덕교육을 유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도덕교육을 완전히 없앨 수도 없는 일이라면 남은 길은 하나뿐이다. 즉 도덕교육의 본래성을 회복하고 그것에 제자리를 찾아주는 것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길이다.
...물론 도덕교육은 학생들에게 수많은 당위적 규범들을 가르친다. 하지만 우리가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명제의 형식이 사실명제가 아니라 당위적 명제라 해서 그것이 자동적으로 '도덕적 규칙들과 원리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생각하면 인간은 어디서나 나름의 윤리와 도덕을 만든다. 조직폭력배, 군대, 기업가, 상인, 종교 역시..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모든 규범들이 참된 도덕적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특정 사회 공동체의 공동 의지가 그 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한, 그런 공동 의지로부터 발생하는 규범은 결코 참된 의미의 도덕적 가치를 가질 수는 없다. 참된 도덕은 오직 인간 일반의 보편적 공동 의지의 표현으로서만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라 표현하든지 간에 참된 도덕적 정신은 언제나 자기의 의지를 무제약적인 보편적 의지와 일치시키려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나도 아니고 우리 국가나 민족도 아니라 온 인류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의욕할 때, 아니 모든 생명체의 입장과 전 우주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의욕할 때, 그리고 지금뿐만 아니라 영원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의욕할 때, 비로소 우리는 도덕적 주체의 관점에서 사유하고 행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도덕은 철학과 동근원적이다. 오직 철학만이 무제약적인 보편성의 지평에서 사유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반성적 성찰에 의해 인도되지 않는 즉자적 도덕성이란 주체가 처해 있는 상황이 바뀔 경우에는 언제라도 흔들릴 수 있다. 오직 우리의 의지가 대자적인 자기반성에 의해 인도되어 보편적 관점을 지향할 때, 우리의 도덕적 의지는 굳건하고 견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 우리의 도덕적 의지는 자기 자신을 반성적으로 성찰할 수 있게 되는가? 그것은 오직 우리가 철학적으로 사유할 수 있을 때이다. 대자적 도덕이란 반성된 도덕 의지이다. 그것은 자기의 의지를 보다 보편적인 의지의 입장과 견주어보고 자기의 의지를 궁극적으로 무제약적인 보편적 의지와 일치시키려는 의지이다. 대자적 도덕이 철학과 동근원적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도덕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이 곧 철학적으로 사유한다는 것과 같은 까닭은 두 가지가 모두 보편적으로 사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덕적 의지가 즉자적 욕구가 아니라 대자적 반성과 더불어 무제약적으로 보편적인 의지를 지향할 때, 그런 보편성을 감당할 수 있는 사유는 오직 철학적 사유밖에 없다.
p.100
이것이 도덕교육을 인도하고 규제해야 할 이념형이다. 도덕교육은 학생들로 하여금 자기의 사사로운 욕구를 보다 보편적인 의지의 입장에서 비판하고 확장시키도록 이끌어야 한다. 나의 입장에서 우리의 입장으로, 그리고 같은 우리라도 가족의 입장에서 사회 공동체와 국가의 입장으로, 다시 국가의 입장에서 인류의 입장으로 그리고 가능하다면 인류의 입장에서 온 생명의 입장으로 나아가 생각하고 의욕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의지를 전체의 의지 아래 노예적으로 종속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끝내는 나의 의지가 우주적 의지의 주체가 되기까지 나의 의지를 자유롭게 확장시키기 위해서이다. 이런 의미에서 도덕의 지향점은 참된 자유의 실현이요, 도덕교육의 목표는 자유의 능력의 계발과 같다.
p.107
바로 이처럼 도덕교육의 궁극적 목적이 자유롭고 자율적인 도덕적 주체성의 실현을 지향할 때에만 국가에 의한 도덕교육은 불순한 이데올로기 교육으로부터 벗어나 참된 의의와 가치를 얻을 수 있다. 앞에서 우리는 도덕성과 관련하여 근대 이후 제도화된 공교육의 체계 속에 숨어 있는 본질적인 위험을 지적했다. 도덕교육이 권력에 의해 도구화되어 이데올로기 교육으로 전락할 위험은 근대적 공교육의 체계 그 자체 속에 내재하고 있는 위험이다. 그러나 그 위험 때문에 도덕교육 자체를 제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인간은 자신에 의해 교육받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 속에는 사실에 관한 교육뿐만 아니라 가치에 관한 교육 역시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도덕교육이 획일적이고 억압적인 규범교육이 되는 한, 그것은 굳이 독재권력의 추구가 아니라 하더라도 봉건적인 예절교육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해야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적 이데오로기를 주입하기 위한 도구과목이 될 뿐이다. 도덕교육이 덕목과 가치의 일방적 주입이 아니라 덕목과 가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과정이 되고 이를 통해 가치를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정립하는 능력을 길러주는 과정이 될 때에만 국가가 실시하는 도덕교육은 이데올로기 교육으로 전락할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게 가치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학문이 바로 철학인 한에서 도덕교육은 오직 철학에 굳건히 터하고 있을 때에만 자기의 존재 이유를 잃지 않을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지금처럼 도덕교육이 철학을 도구적으로 이용하려고만 할 뿐, 실질적으로는 철저히 배제하려 할 때, 도덕교육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종말의 운명뿐이다.
p.108
잘 알려진대로 1981년 서울대학교에 국민윤리교육과가 설치된 이래 도덕교육은 교사 양성 및 교과서 집필에서 이 새로운 학과에 의해 철저히 독점되었던바, 그 이후 철학은 도덕교육으로부터 제도적으로 배제되어 왔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철학적 정신은 독재권력과 본질적으로 불화한다. 철학적 정신의 본질은 자유이지만 독재권력은 바로 그 자유로운 정신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p.110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것은 존재가 무엇이든 간에 존재가 존재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있음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런 한에서는 없는 것이다. 있음은 언제나 비어 있음이다. 오직 그 비어 있음 속에서만 있는 것들이 있을 수 있다.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 채움으로써 있는 것이지만, 있음 그 자체는 오직 비어 있음으로서만 있는 것들을 있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있음이 비어 있음이라는 것은 있음이 또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있음은 어떤 술어를 통해서도 한 가지 방식으로 고정되어 규정될 수 없다.
...그러므로 있음의 가징 근원적인 원형상은 될 수 있음이다. 있음은 무엇이든 될 수 있음이다.
p.129
도대체 교육이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소크라테스적 이해에 따르면 교육은 산파술이었다. 그것은 피교육자의 정신 속에 내재하는 진리를 개방하고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로마인들은 교육의 이런 본질적 진리를 표현하기 위해 그것을 에두카치오(educatio) 곧 이끌어냄이라고 불렀다. 근대에 들어 헤겔과 그의 시대 독일인들은 교육을 도야(陶冶), 곧 형성(Bildung)이라고 즐겨 표현했다.
p.147
바로 여기에 오늘날 도덕교육이 직면한 위기의 뿌리가 있다. 교과서가 가르치는 바에 따르면, 자유는 방종과 같은 것이 되어버리고, 개인주의는 비도덕적 태도의 전형이며, 갈등과 무질서는 가장 두려운 사회악이고, 국가와 민족은 언제나 신성하고 오류를 모르는 거대주체이다. 그리하여 욕망은 억압되어야 하고, 차이는 동질성 앞에서 침묵해야 하며, 개인은 전체를 위해 언제라도 희생될 수 있어야 한다. 도덕교육이란 이런 규범들을 주입하는 것이며, 학생들은 이런 전체주의적 노예도덕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p.150
도덕은 어떤 종류 어떤 의미이든 당위의 의식을 동반한다. 만약 인간의 의지가 오직 좋은 것에 대한 지향으로만 발생하는 것이었더라면, 의지는 욕망과 전혀 구별되지 않았을 것이요, 도덕은 처세술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도덕은 의지와 욕망이 구별되고 대립하는 곳에서 발생한다. 그렇게 의지와 욕망이 대립할 때, 의지는 도덕적 의지가 되며, 욕망에 대해서는 당위와 강제로 나타나게 된다.
p.157
그러나 윤리학의 역사에서 칸트가 이룩한 공적은 법칙의 위엄을 주장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법칙의 위엄을 오로지 주체의 자유로운 입법의 능력에 정초시켰다는 데 있다. 그에 따르면 도덕적 법칙이 누리는 위엄과 신성함은 그것이 법칙이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법칙이 나 자신에 의해 정립되고 입법화되었다는 데 있다. 칸트는 자기가 입법하지 않은 법칙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는 타율적 법칙에 대한 노예적 굴종을 도덕이라고 강변한 적이 없다. 칸트에 따르면 도덕적 법칙의 정당성은 오로지 그것이 주체 자신의 자유로운 입법의 소산이라는 데 있다. 따라서 주체의 입법에 앞서서 미리 존재하는 도덕 법칙 같은 것을 칸트는 인정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객관적인 도덕적 법칙(Gesetz)이 아니라 우리들 각자가 스스로 수립하는 준칙(Maxime)이다. 다만 도덕적 능력은 자기의 주관적 행위원리인 준칙이 보편적인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 법칙이 되도록 하는 데 있다. 도덕 법칙은 나 자신에 의해 정립됨으로써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보편적인 도덕 법칙을 스스로 입법하고 자기가 정립한 법칙에 스스로 복종할 때, 비로소 법칙은 진정한 정당성과 권위를 얻게 되며 우리의 도덕적 의지 역시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에 따르면 도덕적 능력은 단순히 법칙을 따르는 능력이기 이전에, 법칙을 능동적으로 정립하고 입법하는 능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도덕적 능력은 자유의 능력이다. 그리고 도덕교육의 목적이 도덕적 능력의 함양이라면,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자유로운 자기 입법의 능력을 계발하고 확장하느 것이 아니면 안 된다.
p.159
그러나 내가 너와 함께 우리가 됨으로써만 내가 될 수도 있는 것이라면 나의 자기정립과 자기실현을 욕구하는 도덕적 의지는 오직 청유형(adhortativus)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 영어식으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I will이 아니라 Let's의 형태로만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진정한 도덕적 의지가 자기를 희구법을 통해서도 명령법(imperativus)을 통해서도 표현할 수 없으며 오직 청유형 속에서만 표현하고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은 도덕적 강제가 그 뿌리에서는 욕망도 아니지만 강제나 명령도 아니며, 오로지 제안과 약속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렇지 않을 경우 내가 홀로주체로서 객체인 너에게 군림하거나 아니면 네가 홀로주체로서 객체인 나에게 군림할 뿐, 진정한 의미의 공동주체로서 우리는 발생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청유형이란 타인에 대해서는 제안이지만, 자기에 대해서는 약속이다. 청유형 속에서 나는 너에게 이루어져야 할 무엇인가를 제안하고 그 제안에 네가 동참해줄 것을 정중하게 요청한다. 그러나 그 제안이 일방적인 명령이 아니라 청유일 때, 그것은 나와 네가 오직 공동으로 이룰 수 있고 실현할 수 있는 어떤 일, 곧 공동주체로서의 '우리'의 형성을 위해 너를 초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우리가 오직 나와 너의 공동의 참여를 통해서만 정립되고 형성될 수 있는 한에서, 우리를 형성하자고 내가 너에게 청하는 것은 나 역시 우리의 형성에 참여하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내가 너에게 '가자'고 말할 때, 그 말은 너에게 갈 것을 요청하는 말인 동시에 나도 가겠다는 약속하는 말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적 강제란 그것의 뿌리에서 보자면 내가 너에게 자유롭게 약속하는 것이다. 나는 나를 참된 주체로 정립하기 위해 너와 함께 우리가 되어야 하는데, 내가 너와 함께 우리가 되기 위해서는 너에게 제안하는 동시에 너에게 약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약속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를 자기 스스로 구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자유로운 구속이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강제의 본질이다. 여기서 내가 나를 구속한다는 것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를 스스로 강제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도덕교육이 자유로운 자기실현의 능력을 계발하고 함양하는 것이라면, 이제 그것은 약속을 할 수 있는 능력과 그 약속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의 계발이어야 한다. 약속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너와 함께 우리가 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p.165
첫째로 주체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생각한다는 것은 묻는 것이다. 그리하여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스스로 묻는 것을 의미한다. 노예는 묻지 않는다. 그는 시키는대로 일할 뿐이다. 오직 자유로운 정신만이 남들이 침묵하는 곳에서 왜라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은 스스로 묻는 것뿐만 아니라 스스로 대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참된 이해는 내가 사물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단순히 밖으로부터 수납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내 안에서 능동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어떤 사태에 대해 아무리 많은 것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왜 그런지 알지 못한다면 나는 아직 그것을 인식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그것이 왜 그런지 까닭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하더라도 그 까닭을 남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때 역시 나는 아직 그것을 온전히 인식했다고 말할 수 없다. 여기서 남이 아닌 내가 그 까닭을 이해한다는 것은 내가 어떤 일이 그럴 수밖에 없는 까닭을 바로 나의 생각 속에서 나의 생각의 질서에 따라 최종적으로 승인하고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생각은 사물의 마지막 근거이며, 진리의 마지막 심급이다.
...그러나 사람이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은 사물의 이치를 자기 속에서 승인한다는 것, 또한 그런 의미에서 사물의 이치를 자기 속에서 근거짓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람이 사물로 향하던 마음의 눈을 돌이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물의 이치를 최종적으로 자기 속에서 승인하기 위해서는 객관적 사물의 이치를 자기의 생각의 질서와 원리에 견주어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은 돌이켜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돌이켜 생각함이란 반성이요, 자기 자신과의 대화이다.
...그러나 생각의 자기반성이란 이것만으로 완성될 수 없다. 왜냐하면 형식 논리적 반성은 생각의 내적 정합성과 일치 여부를 검사하기는 하지만, 생각의 구체적 내용의 참과 거짓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나와 너의 만남이다. 나의 삶은 언제나 우리 속에서의 삶이다. 그리하여 앎이 삶 속에서 검증되어야 한다는 것은 그것이 나와 너의 만남 속에서 검증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한에서 이성적 인식능력으로서의 생각은 마지막에는 만남 속에서 완성된다. 이것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는 마지막으로 생각은 더불어 생각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생각은 나와 너의 대화이다. 그리고 생각의 자유 역시 개별적 주체 홀로만의 자유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는 나와 너의 만남 속에서 우리 모두의 자유로서만 완성될 수 있다.
...자유도 진리도 홀로주체로서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나와 너가 서로주체성 속에서 더불어 형성하고 완성해야만 할 삶의 궁극적 과제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사물에 대한 인식의 진리는 스스로 생각함에 있다. 그러나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은 돌이켜 생각한다는 것이며, 그런 한에서 생각의 진리는 자기반성에 있다. 오랫동안 철학자들은 반성이 진리의 최종심급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반성은 대화이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자기와의 대화이며 보다 근원적으로는 타인과의 대화이다. 그런 한에서 반성의 진리는 타인과의 만남과 대화이다. 그리고 생각의 진리는 최종적으로 만남에 터하는 것이다. 이런 사정을 가리켜 우리는 진리의 서로주체성이라 부른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에 대한 시금석은 사물 자체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홀로주체의 사유와 반성 속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나와 너의 만남 속에서 최종적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자유도 마찬가지이다. 진리와 자유가 공속하는 한에서 생각의 진리가 서로주체성에 존립하는 것처럼 자유 역시 서로주체성 속에서만 완성된다.
p.172
도덕교육의 첫 번째 과제가 학생들에게 자기긍정의 감정을 뿌리내리게 하는 데 있다면, 이를 위해 도덕교육이 해야 할 일은 학생들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학생들에게 먼저 사랑을 주는 일이다. 학생들은 교사로부터 인정받고 사람받는 한에서만 자기를 긍정하고 자기를 참되게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건강한 자기애의 바탕 위애서만 학생들은 무엇이 자기를 위해 진정으로 좋은 것인지를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다.
생각하면 이 점에서 한국의 도덕교육은 근본에서부터 잘못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학생들에게 자기애가 아니라 이타심과 공동체에 대한 희생정신을 먼저 주입하려는 성급함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애 없는 이웃사랑이나 이타심은 가능한 것도 아닐뿐더러, 마지막에는 인간을 위선자로 만들 뿐이다. 그런데 한국의 도덕 교과서는 이기심과 개인주의를 비도덕적인 태도라고 비판할 뿐, 학생들에게 참된 자기사랑과 자기에 대한 긍지를 가르치려 하지는 않는다. 게대가 한국의 학교 분위기는 교사가 학생들을 존중하고 인정함으로써 권위주의적인 사제관계 속에서 학생들을 비굴한 노예로 만드는 경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까 내용과 방식 모두에서 현재의 도덕교육은 심각하게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참된 도덕교육이 자기를 소중히 여기고 무엇이 자기에게 정말로 좋은 것인지를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어야 한다면, 그것은 이제 학생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표현하게 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좋은 것은 우리가 욕구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욕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좋은 것이 없다. 따라서 무엇이 나를 위해 좋은 것인지를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자신의 욕망과 욕구를 스스로 알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다시 자기의 욕망과 욕구를 능동적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만 한다. 따라서 도덕교육은 학생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자기의 욕망과 욕구를 표현하고 그것을 스스로 돌이켜보게 하며 거기서 무엇이 자기를 위해 정말로 좋은 것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 것인지를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어야 한다.
p.181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 도덕교육의 과제는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복돋우고 길러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도덕적 훈련은 참된 우정을 맺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따뜻한 관심, 타인을 사랑하고 그를 위해 자기의 이기적인 욕망을 제한하는 마음씨는 다른 무엇보다 우정을 통해 생겨난다.
...그런데 한국의 도덕 교과서가 가장 강조해서 가르치려 하는 자기와 타인의 관계는 수평적인 우정과 사랑이 아니라 수직적인 예절이다.
...그런데 한국의 학교교육에서는 과도한 입시경쟁이 학생들의 삶을 전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까닭에 타인에 대한 사랑이 경쟁심에 의해 구조적으로 방해받고 왜곡된다. 이것은 아이들을 자기 중심적으로 만들고 타인의 성공을 시기하는 편협한 인간으로 만들어 진정한 도덕적 능력의 계발을 방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다.
p.184
주체의 자기실현의 의지가 궁극적으로 모든 인류의 절대적 서로주체성 속에서만 완성될 수 있는 한에서 너를 위해 좋은 것은 또한 우리 모두를 위해 좋은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고 너를 위해 좋은 것이 대다수 사람들을 위해 나쁜 것이 될 때, 너를 위해 좋은 것을 추구하는 것은 맹목적 집착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처럼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도리어 미움과 불의의 씨앗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타인에 대한 직접적 관시을 인간 일반에 대한 보편적 관시으로 승화시켜야만 한다. 그것이 도덕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라 할 수 있는 정의감이고 인류애이다.
p.186
윤리학이 아니라 존재론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본질적으로 우리의 있음은 언제나 빚지고 있음이다. 이런 사정은 인간의 경험적 존재에 대해서는 물론이지만, 선험론적 의미에서 인간의 주체성을 고찰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단순한 자연적 사물이나 생물학적인 종이 아니라 생각과 활동의 주체로서만 온전한 의미에서 인간으로 존재한다. 그런데 인간의 주체성은 결코 고립된 홀로주체성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나는 오직 너와의 만남 속에서 우리가 됨으로써만 개별적 주체인 나로서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서로주체성이다. 서로주체성의 진리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나는 오직 너를 통해서만 내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 한에서 나는 본질적으로 너에게 빚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도덕교육의 구체적 과제는 간단히 말해 약속의 능력을 길러주고 감사의 마음을 일깨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p.193
그러나 우리가 도덕교육의 목표를 단순한 앎이라 부르지 않고 깨달음이라 부르는 까닭은 그것이 어떤 경우에도 억압적인 훈육이나 주입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모든 깨달음은 스스로 깨달음이다. 스스로 깨닫지 않는 것은 깨달음이 아니다. 그런즉 깨달음의 과정은 언제나 자유로운 성찰의과정이어야 한다. 그것은 억압적인 훈육도 맹목적인 동화의 과정도 아니라 자유로운 반성과 대화의 과정이어야 한다.
p.200
보다 세분해서 말하자면, 아름다움과 숭고 가운데 아름다움이 먼저 오고 숭고가 나중에 와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하여 같은 초등학생들이라도 저학년의 경우에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통해 도덕적 모범을 보여주어야 한다면, 고학년으로 갈수록 숭고한 이야기를 통해 도덕적 모범을 보여주어야 한다. 아름다움은 사랑과 조화에 존립하지만 숭고는 불화와 다툼을 반드시 전제한다. 더 나아가 아름다움은 마음의 조화로운 유희상태를 낳지만 숭고는 정신의 긴장을 동반한다.
p.2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체 학교교육과정에서 저학년으로 갈수록 상대적으로 수동적 감수성의 몫이 중요하다는 것과 그 수동성이 단순한 타율성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미적 감수성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적어도 초등학교 도덕교과정에서 과도한 지성적 훈련은 일반적으로 도덕성의 함양에 기여하기보다는 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을 토론을 통해 덕으로 이끌 수 있다고 믿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부적절한 일이다. 루소는 '에밀'에서 그 당시 계몽주의자들이 아이들을 무작정 토론을 통해 교육하려 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비판한다.
...이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도덕적 반성능력의 토대를 닦는 일이지만, 그 토대는 비판적 사고능력이 아니라 도덕적 감수성이다. 한마디로 말해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문제인 것이다.
p.224
초등학교 과정에서 도덕적 감수성이 일깨워진 학생들은 이제 중학교 과정에서는 선의 개념 및 그에 귀속하는 모든 도덕적인 일들을 능동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주어지는 도덕적 모범을 받아들이고 그에 감동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수동적인 과정이라면 무엇이 선인지를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그에 비해서는 능동적인 활동이다. 그것은 이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활동이요, 더 나아가 좋은 것을 스스로 형성하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모든 생각은 그 자체로서는 규정하는 일이다. 쉽게 말해 일과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것, 그것이 생각의 일인 것이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구별한다는 것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어떤 것을 어떤 것이라 부르는 것은 그것을 이제 그것 아닌 다른 모든 것들, 즉 아닌-그것과 구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사정은 비단 이론적 인식의 문제뿐만 아니라 도덕적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정신이 도덕적 일에 관해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를 규정하고 구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p.228
돌이켜보면 모든 생각은 단지 구분하고 나누는 일에서 그치지는 않는다. 도리어 생각은 근원적으로 보자면 결합하는 일이다. 나누는 일 역시 언제나 결합이 먼저 갈 때 가능하다. 그러니까 칸트도 말했듯이 분석은 늘 종합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를 처음 구별하는 학생에게도 먼저 하나의 도덕적 세계가 주어져 있다. 그것은 인간이 기성세대로부터 수동적으로 물려받은 세계로서, 인간정신의 발전과정이 처음부터 능동적일 수 없는 한에서 누구도 물려받은 세계 없이 처음부터 자기 세계를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도덕적 세계의 능동적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이제 물려받은 세계를 해체하고 스스로 재구성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규정하고 나누는 작업은 바로 그런 해체와 재구성의 첫걸음이다.
그러나 이 결합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끈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법칙이다. 도덕적 세계를 형성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도덕적 법칙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적 세계를 스스로 형성한다는 것은 도덕적 세게의 법칙을 스스로 입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덕적 성품과 소질은 남이 부과하는 법칙을 타율적 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법칙을 제정하는 능력에 존립한다. 그런즉 중학교 과정에서 도덕교육이 마지막으로 마음 써야 할 과제는 학생들로 하여금 보편적인 도덕 법칙을 스스로 제정할 수 있는 입법능력을 길러주는 것이다.
p.237
중학교 과정에서 도덕교육은 도덕적 문제 앞에서 무엇이 좋고 나쁘며, 또 옳고 그른지를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기르는데서 시작하여 보편적인 도덕 법칙을 스스로 입법하고 하나의 도덕적 세계를 기투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을 지향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의 세계를 기투하고 형성하는 것은 더 이상 도덕적 판단력이 떠맡을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판단력은 규정적 판단력이든 반성적 판단력이든 간에 개별자와 보편자 사이를 매개하는 능력이기는 하지만 그 자신 보편적 법칙이나 세계의 이념을 정립하는 능력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덕적 정신이 낱낱의 사례들에서 선악을 판단하는 데 머물지 않고 보편적 법칙을 정립하고 형성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제 보편과 특수를 매개하는 판단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편자를 그 자체로서 사유하는 이성의 단계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칸트는 판단력과 이성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었다.
...여기서 칸트는 사병과 장교 그리고 장군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사병의 경우에는 오성만으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지만 장교에게는 이에 더하여 판단력이 그리고 장군에게는 이성이 요구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오성은 이해력이다. 그것은 말을 알아듣는 능력이다. 주어진 명령을 수행하면 되는 사병들의 경우에는 오직 명령을 알아듣는 이해력이 있기만 하다면 자기의 임무를 완수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일반규칙만이 주어져 있고 낱낱의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할지는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장교의 경우에는 판단력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보편적 규칙 그 자체를 제정해야 하는 장군의 경우에는 이성을 가져야만 한다.
p.238
이런 의미에서 도덕교육은 마지막 단계에서는 아무리 공허하고 추상적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현실을 총체성 속에서 사유하도록 자극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학생들로 하여금 현실을 편협한 한계 속에 가둔 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다 넓은 전체의 지평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하는 것이다. 무엇을 생각하든 전체의 문맥 속에서 생각하는 것, 이것이 고등학교 과정에서 도덕교육이 마음 써야 할 과제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무엇을 생각하든 객관적으로는 전체 세계와 인류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주관적으로는 보편적이고도 전인적인 인간성의 척도에서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이제 우리의 학생들이 마지막으로 배워야 할 미덕인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덕교육은 자연적이든 초자연적이든 이승이든 저승이든 우리가 생각하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존재의 지평을 넘어 절대적 없음의 심연에 이르기까지 학생들의 정신을 이끌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오직 절대적 없음 앞에 마주설 때, 정신은 존재를 무제약적 총체성 속에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p.243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예의는 그런 상호존중의 표현이 아니라 지위가 다른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권력관계의 확인으로 나타난다. 즉 예의란 사회적 약자가 자기보다 강한 사람에게 어쩔 수 없이 표시해야 하는 공손함인 것이다. 그래서 예의가 상호적인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이런 사회에서 사람들이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예의를 지키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의와 정중함이 타인보다 자기가 사회적으로 힘없고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라면, 누가 즐겨 자기의 약함을 남에게 드러내 보이려 하겠는가? 도리어 이런 사회에서는 자기가 사회적 강제에 의해 매여 있는 사람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예의를 지키면서도 자기와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무례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일반적 경우인 것이다. 예의가 낮은 지위와 비천한 신분의 표현이라면, 무례는 오히려 우월한 권력과 사회적 지위의 표현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 앞에서는 나도 너만 못지 않은 인간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무례해지는 것이다.
p.272
사실 분노는 도덕의 본질적 계기이니 분노 없이는 도덕도 없다. 이를테면 사람들이 나이 들어 불의한 일에 예전과 같은 분노를 더 이상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김없이 도덕성 쇠락의 징표이다.
...분노는 오직 공공적인 불의에 대한 것일 때에만 정의감의 표현으로서 도덕적인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이 한계가 언제나 명확한 것은 아니다. 만약 불의한 일의 피해자가 나 자신이라 하더라도, 가해자가 공공적 권력이나 제도라면, 그런 경우 불의에 분노하지 않고 참는 것은 악덕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피해자는 나 하나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과 다른 사람의 사사로운 관계에서 불의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그것이 자기 일이 아니라고 해서 분노할 줄 모른다면 그것 역시 미덕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자기 일이 아니라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마음씨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정의감의 결여와 보편적인 온전한 만남의 이념에 대한 무관심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p.282
그렇다면 우리에게 국가의 이름으로 사이비 도덕을 불러준 사람이 누구인가? 전두환 정권에서부터 지금까지 그 일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서울대학교 국민윤리학과의 교수들이었다. 전두환과 당시 교육부 장관이었던 철학자 이규호가 야합하여 낳은 자식이 바로 서울대학교의 국민윤리학과인데, 이 학과의 교수들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우리에게 사이비 도덕을 불러주었던 사람들이었다.
서울대학교란 학교가 뜻있는 사람들의 경멸을 받을만한 짓들을 하는 것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닌데 그 대학의 국민윤리교육과가 바로 그런 경우라 하겠다. 이 학과는 전두환의 비호 아래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한국의 대다수 국민윤리교욱과나 국민윤리학과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윤리교육과로 이름을 바꾼 오늘에 이르도록 그 자랑스런 국민윤리교육과라는 이름을 바꾸지 않고 고수하고 있는 집단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사람들이 이 계몽된 세상에 우리 모두를 상대로 여전히 유일한 도덕 교사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 큰 어른들을 민방위 훈련장에 집합시켜 놓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연단에 올라와 가소로운 정신훈화를 늘어놓는 것처럼 희극적인 일이다.
p.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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