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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세계사 | 김경묵, 우종익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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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세계사 | 김경묵, 우종익

prs21 2016. 9. 10. 16:36




1. 말이 세계사지, 칭기즈칸 빼면 그냥 유럽사

2. 4대 성인 중 서양의 2명은 사형당하고 동양의 2명은 천수를 다했다는 것

   (사회의 변화를 더 추구했느냐, 개인의 수양을 더 추구했느냐의 차이같음)

3. 종교는 인간의 산물이다. 특히 구약은 표절이다.

4. 같이 위대한 철학자를 스승으로 뒀던 알렉산더와 네로의 경우

   한결같이 학문에 점철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알렉산더는 세계를 정복한 영웅이 되었고

   금욕주의를 표방하면서도 막대한 부를 차지하며 시대의 모순을 보여줬던 세네카의 제자

   네로는 세기의 폭군으로 비참하게 죽었다는 것

   역시 스승을 잘 골라야 하는 법

5. 국민의 동의없는 독재는 언제나 추악한 말로는 겪는다는 것

6. 후계자를 세습하는 것보다 능력에 따른 지명으로 선정할 때 태평성대가 더 많았다는 것

7. 혁명의 성공은 자본력과 실행력을 소유한 자들이 민족주의와 같은 이념이나 경제력과 같이 생존의 상황에 처했을 때, 

   절대 다수인 피지배계층의 공감을 얻었을 때 비로소 성공했으며, 

   그 지도자는 위대한 사상가이기보다는 대부분 군사전략에 능한 군인들이었다.

8. 산업화 이후 혁명세력들은 대부분 사상정립에 주력했고, 

   똑같이 개혁과 변화를 추구하더라도 사상적 논리의 이견이 있는 경우에는 서로 비판하며 규합하지 못했다. 
   반면 자본가나 기득권들은 그렇게 규합하지 못하고 개별적으로 개혁을 부르짓는 자들을 제도와 공권력을 통해 하나씩 각개격파하거나 
   그에 상응하는 제도수정을 해나감으로써 민중의 저항을 받지 않으며 손쉽게 그들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9. 유럽-중동의 역사를 두 단어로 표현하자면 '전쟁'과 '종교'다. 합해서 종교전쟁. 혹은 종교적 왕위 쟁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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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 수메르인이 남긴 홍수신화이다. 이 신화는 바빌로니아 때에 이르러 약간 변형되었지만 기본적인 줄거리는 바뀌지 않았다. 바뀐 내용은 살아남은 인간의 이름이 지우수드라에서 우트나피슈팀으로, 홍수가 일어난 곳이 유프라테스 강 언덕의 슈롯파크라는 곳으로 한정되는 정도였다.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에서도 기본적인 줄거리는 바뀌지 않았다. 다만 인간들의 죄를 벌하는 신이 여호와라는 유일신으로 바뀌고 배가 도착한 장소가 니시르 산에서 애라렛 산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p.37


당시까지 헤브라이인들은 '약속된 땅'의 구릉 지대에 머물러 있었다. 팔레스타인의 해안 지역은 아직 셈족 계통의 해적집단인 필리스틴인들이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들이 세운 도시들은 헤브라이인들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헤브라이인들이 왕을 선출하여 부족을 통합하고 왕국을 세웠던 이유도 사실은 필리스틴인들과의 싸움에서 정치력과 군사력을 통합해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초대 왕 사울은 전투에서 상당한 무훈을 세우긴 했으나, 도량이 좁고 질투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사울은 가끔씩 노이로제 증세까지도 보였기 때문에 한 민족의 지도자로서 미흡한 점이 많았다. 결국 사울은 백성들의 미움을 받다가 길보아 산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고 난 뒤 자결하고 말았다. 

헤브라이 왕국은 길보아 산에서의 참패 후 국토의 대부분을 필리스틴인들에게 빼앗겼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다윗이다. 그는 사울의 부하로서 많은 무훈을 세웠으나, 백성들 사이에 다윗의 인기가 높아가는 것을 시기한 사울에 의해 쫓겨나 헤브라이 왕국의 남부 지방으로 피신해 있었다. 그러던 차에 사울이 죽고 국토는 필리스틴인들에 의해 유린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다윗은 남부와 북부의 모든 부족들을 규합하여 필리스틴인들과 전투를 벌이며 국토를 회복하였다. 

그는 왕국의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정하고 각 부족들의 군사력을 한데 모아 요르단 강 동쪽 지역과 다마스쿠스를 포함하는 시리아의 일부 지역에까지 세력을 확대하였다. 이후로 예루살렘은 헤브라이인의 유일신인 야훼 숭배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토록 번영을 누리던 솔로몬 시대에도 헤브라이 왕국은 여러 가지 모순을 지니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헤브라이인들의 부족주의가 가장 큰 문제였다. 솔로몬은 통일왕국의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그들의 전통적인 부족제도를 해체하여 중앙집권적 관료 체제로 개편하여 했다. 이에 대한 각 부족들의 반발은 상당히 강력했다. 그럼에도 솔로몬은 대토목공사를 일으켜 많은 백성들을 노역에 동원하고 무리한 세금을 징수하였다. 정치, 사회적 안정의 기초가 없이 무리한 경영을 한 솔로몬이 사망하자 억눌린 분노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사회는 불안에 빠지게 되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새로운 헤브라이의 왕으로 즉위하자 압정에 허덕이던 북부의 부족들이 강제노역과 세금을 줄여달라고 요구하였다. 르호보암은 단호히 거절하고 오히려 더 큰 압박을 가하였다. 

일이 이런 상황에 이르자, 북부의 10개 부족은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새로운 국가를 세웠다. 남부의 두 부족은 예루살람의 왕에 대한 충성을 계속했는데, 이 국가를 유대 왕국이라 불렀다. 

p.80


이러한 페르시아의 종교는 기원전 7~6세기 무렵에 예언자 조로아스터에 의하여 신학과 우주관을 갖춘 종교로 재조직되었다. 즉 우주 최고의 신 아후라 마즈다는 우주의 모든 선을 지배하며 어둠과 악의 신인 아리만은 악령 다에바스를 지휘하여 모든 선을 위협한다.

세상의 종말에 이르러 선과 악은 서로 싸우게 되는데, 승자는 아후라-마즈다이다. 악한 자는 세상의 종말 후 고통을 받으며 선한 자는 천상에서 축복을 받으며 살게 된다고 한다. 여기서 조로아스터는 원시 아리아 민족의 천신 바루나에 대한 신앙에 도덕성을 가미했던 것이다.

이 종교는 계속 발전하여 후에는 태양신 미트라가 인간의 구원을 돕는 신으로 추가되었으며, 그리스도교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p.95


아테네인들은 왜 소크라테스를 죽였을까? 과연 고발장에 적힌 죄 때문이었을까? 30인 참주정의 압제를 경험한 아테네인들은 민주정의 부활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추첨으로 아르콘을 선정하는 제도에 대해 말하면서 이 제도에 의하면 무능한 인물을 선출할 염려가 있다하여 비판한 일이 있었다. 게다가 그의 제자들 중에는 아테네에 큰 해를 끼쳤던 알키비아데스, 공포정치의 주역인 크리티아스, 아테네를 떠나서 스파르타와 페르시아에 붙었던 크세노폰 등 많은 위험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아네테인들은 소크라테스를 위험한 인물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평생을 애국자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출정해서 용감히 싸웠고, 평의회위원으로서는 그의 참된 양식을 발휘했다. 그는 죽음 앞에서조차 아테네의 명령을 따랐다.

그러나 아테네인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당시의 사람들 가운데 가장 현명하고 의로우며 뛰어난 인물이었던 소크라테스를 그들 스스로 죽였던 것이다.

p.161


다음해 65년에는 원로원 의원 피소의 황제 암살 음모가 발각되어 많은 유력인사들이 처형되었다. 그 중에는 네로의 예술 지도자였던 페트로니우스와 예리한 감각을 지녔던 애인 루카누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울러 루카누스의 백부인 세네카에게도 음모 가담의 혐의를 씌워 자결을 명했다. 그는 당시의 자결 방법대로 손발의 혈관을 통해 독약을 흘려 넣은 뒤 한증탕의 열기 속에서 죽어갔다. 이렇게 하여 스토아 철학자로서 네로를 보필해 현실정치에 뛰어 들었을 뿐만 아니라, 해외무역과 고리대금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차지하여 시대의 모순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던 세네카까지 죽고 말았다.

p.301


그가 죽자 원로원은 60대에 접어든 원로원 의원 네르바를 황제로 선출했다. 그는 원로원과 잘 협조하여 좋은 정치를 해나갔다. 그러나 네르바는 나이가 많았을 뿐 아니라, 군대의 통솔에도 자신이 없었다. 그리하여 이제까지의 세습제도를 바꾸어 상게르마니아의 총독 트라야누스를 그의 양자로 지명하는 이례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이것을 선례로 하여 이후 3대에 걸쳐 가장 유능한 자를 양자로 맞아 제위를 계승시키는 관례가 이어졌다. 그 결과, 네르바에서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우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까지 이르는 소위 '오현제'가 계속 등장하게 되어 로마는 눈부신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그 중 한명이던 루키우스 베루스는 재위 8년 만에 죽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만이 단독으로 집권하게 되었다. 이 황제는 여러 차례에 걸친 외적들의 침입을 잘 막아내어 로마 제국의 판도를 유지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스토아 철학자로서 저 유명한 '명상록'을 집필하는 여유를 보였다.

좋은 정치를 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때까지의 관례를 깨뜨리고 친자식인 코모두스 황제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 그런데 코모두스는 철학자였던 그의 아버지와는 정반대로 우둔하고 퇴폐적인 인물이었으며, 정치는 아첨하는 측근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향락에만 몰두했다. 그는 자신이 영웅 헤라클레스의 화신이라고도 하고, 검노로 분장하여 투기장에 나가기도 하는 등 네로와 비슷한 폭군의 길을 걸었다. 또 그는 원로원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근위대의 봉급을 인상하여 국가 재정을 혼란에 빠뜨렸으며, 돈이 부족해지면 유력자의 재산을 함부로 몰수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결국 그는 근위사령관과 첩의 공모에 걸려들어 욕실에서 무참히 살해되고 말았다.

p.317


그러나 교수들도 그렇게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들도 콜레지아Collegia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현재 종합대학이라는 유니버시티와 단과대학을 뜻하는 칼리지는 사실 학생조합과 교수조합을 뜻하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교수들의 조직인 콜레지아에 가입을 원하는 사람은 어려운 자격심사를 거쳐야 하였다. 학생들도 장차 교수가 되거나 취직하기 위해서는 이 콜레지아 조직에 가입해야 했으므로 함부로 대항하지는 못했지만 중세의 볼로냐 대학의 주인은 여전히 학생이었다.

p.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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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마르크스가 혹독하게 비판한 자본주의 사회는 훗날 공산주의자들의 비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수정 대책을 마련했다. 이로써 마르크스의 예언은 빗나가고 말았다.

p.304


바쿠닌은 마르크스 사상이 위험하다고도 생각했다. 마르크스의 주장대로 공산당이 조직되어 자본주의 국가를 붕괴시킬 경우 공산당이 특권 소유 지배집단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예측은 당시 이상에 불타던 젊은 마르크스주의자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으나 현실적으로는 어느 정도 올바른 예상이었다. 

무정부주의자들은 수많은 정치적 테러를 감행하며 정부 전복을 시도하였으나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들은 20세기의 특징인 정부와 산업의 집중화 경향을 바꾸지 못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무정부주의자가 거의 소멸되었음에도 이들이 현대 사회의 구조와 가치에 도전한 정신은 여전히 살아 있다.

p.305


이런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1832년 휘그의 주도하에 선거법 개정안이 제출돼 하원에서 통과되었다. 개정법의 내용은 유권자의 수를 2배로 늘려 20만명으로 확대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법안을 확정하는 권한을 가진 상원이 이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나타났다. 

상원에서는 선거권을 확대하면 영국의 발전에 결정적인 해악이 된다고 판단하였다. 그 논리는 다음과 같다. 일정한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유권자가 정치 결정의 실권을 가지게 되면 정치는 이들의 비유를 맞추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전체와 공공의 발전보다는 오직 눈앞의 구체적인 이득을 따지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생각할 것이므로 매수와 이권에 눈이 어두워 영국 전체에 해악이 되는 정책을 지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상원의 이런 태도는 분명히 논리 정연한 이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산업화가 1세기 가까이 진행된 영국에서 귀족들의 과도한 지배는 타당성을 찾기 어려웠다. 상원이 거부권을 행사했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수많은 도시에서 폭동과 혁명의 징후가 나타났다. 당시 영국은 이미 소수 귀족만으로 통치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이에 영국 왕 윌리엄 4세는 휘그의 판단이 현상을 안정시키는데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고 상원을 설득하는 한편 상원이 계속 거부권을 행사하면 귀족을 새로 임명하고 이들을 상원으로 진출시켜 선거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겠다고 위협하였다. 

상원은 국왕의 위협을 개탄하였으나 귀족의 대표인 국왕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선거법 개정은 1832년 법안으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영국 전체인구 4천 400만 명과 비교할 때 유권자가 20만 명밖에 안 된다는 것은 여전히 극소수에게만 참정권이 허용됐다고 평가할 수 있다. 

...1940년대 이후 경제가 회복세에 들어서고 특히 1848년 유럽의 혁명이 모두 실패해 반동 복고의 시대로 접어들어 영국의 급진적 개혁세력도 크게 위축되었다. 더욱이 1933년 정부가 대영 제국 내에서 노예 제도를 금지하고 공장입법을 통하여 부녀자와 어린이의 노동조건을 개선하자 노동자들의 불만은 이념적인 것에서부터 현실 개선 쪽으로 전환되었다. 1935년 지방자치 특히 도시의 자치권이 대폭 허용되면서 해당 도시 당국이 주택난, 공중위생, 사회복지 등을 수렴하자 영국은 혁명 없는 개혁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p.306


가장 일반적인 설명은 신제국주의와 산업혁명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다. 산업화에 필요한 원료 확보, 제품 판매에 필요한 시장 요구, 자본투자 대상으로서 식민지가 요구되었다는 것이다.

p.355


파시즘은 자유민주 체제가 인간을 이윤 이외의 어떤 고결한 이념도 인정하지 않는 유물적인 동물로 격하시켰다고 비판했다. 이상주의를 흠모하는 젊은이나 지식인들은 인간의 고결한 본성을 강조하는 파시즘이 좌절에 빠진 사람들을 구원할 유일한 희망이라고 여기고, 그들의 행동주의를 높이 평가하며 추종자로 나섰다. 

파시스트들이 가장 경계한 사상은 마르크스주의였다. 마르크스주의는 민족공동체를 부정하고 계급 간 결합만 강조하는 반면, 파시즘은 모든 계급의 국민을 민족주의의 열기 속에 집어넣고 민족이라는 용광로에 녹여 국민의 일원으로서 삶의 의의를 부여하려 했기에 둘은 극단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낙담과 좌절의 시기에 파시즘은 개인들의 고립감, 무력감, 불안감을 민족이라는 저오하된 이념 속에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p.489


무솔리니는 교황과 제휴하면서 현실 정치가의 면모를 드러냈다. 무솔리니는 가톨릭 인구가 절대 다수인 이탈리아에서 교회를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고 무신록적 자유주의자들로부터 방어할 '교회 수호자'로 평가되었다. 교황 피우스 11세는 파시스트가 세속주의로부터도 교회를 지켜줄 것을 기대했고 무솔리니는 이를 약속했다. 

1929년 교황과 무솔리니가 합의한 '라테란 협정'은 바티칸의 독립을 인정하고 자유주의 시대에 제정된 반종교법을 폐지하며 학교에서 종교 교육의 의무화를 담고 있었다. 따라서 바티칸 교황청은 파시즘과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는 일에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30년대까지 양측의 관계는 우호적이었고 무솔리니는 교회의 지지를 국민통합에 이용할 수 있었다. 물론 교황은 이탈리아의 이집트 침공을 옹호했고, 스페인 내란에 개입하는 일에도 지원했다. 교황은 무솔리니가 히틀러와 접근하는 반유대인 입법을 시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을 가했지만 이것 때문에 양측이 대립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처신했다. 

p.497